혁신 성장엔 ‘재정 확장’ 필수

홍기빈 칼폴라니 사회경제연구소 소장

정부의 재정 정책은 사실상 긴축 기조를 유지해왔다. 이러한 기조에서는 정부가 내건 소득주도성장은 물론 혁신 경제라는 목표 또한 달성할 수 없다. 지금 우리는 거대한 기술 패러다임의 변화 그리고 이와 함께 벌어지는 사회적 변동을 지혜롭게 아우르고 조화시켜 새로운 산업사회를 건설해야 할 변혁기에 있다. 국가의 재정 구조를 (세수에서나 지출에서나) 더욱 적극적인 방향으로 확대해야 하는 시기는 바로 지금이다. 여기가 바로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경제학자였던 슘페터와 케인스가 만나는 지점이기도 하다.

[세상읽기]혁신 성장엔 ‘재정 확장’ 필수

오늘날 경제학자들이 시장 경제의 정상적 상태로 간주하는 균형 상태를 슘페터는 ‘순환적 흐름(circular flow)’이라는 이름을 붙여서 아주 특수한 상태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가장 기초적인 자연 원자재와 노동에서 최종적인 소비에 이르는 길고 복잡한 생산 과정의 연쇄 속에서 모든 재화와 서비스는 모두 쓰임새와 사용량이 결정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고정되어 있으며, 화폐의 흐름 또한 방향과 유통량이 모두 이 순환적 흐름에 정확하게 결박당해 있는 상태이다.

이 상태에서는 결코 혁신이 벌어질 수 없다. 혁신이란 그 전에 존재하지 않았던 기술을 사용하여 그 전에 존재하지 않았던 용도로 인적·물적 자원을 사용하는 것이므로, 결국 기존 용도에 묶여 있는 인적·물적 자원을 빼내오는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존하는 화폐는 모두 기존 균형 상태의 ‘순환적 흐름’에 결박당해 있으므로 이러한 혁신 그리고 그에 수반되는 파괴에 대처하는 데에 필요한 자금을 시장에서 마련하는 것은 결코 여의치 않다. 슘페터는 여기에서 은행의 역할을 강조하였다. 그에 따르면 자본주의의 은행은 스스로의 신용 창조를 통하여 새로운 구매력을 허공으로부터 만들어내는 마법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 존재이다. 그래서 그는 자본주의 경제의 본성인 ‘파괴적 혁신’은 오로지 은행의 적극적인 역할이 혁신 기업가들과 결합될 때만 실현이 될 수 있다고 보았으며, 이에 은행 및 금융 부문을 ‘자본주의의 총본부’라고까지 치켜세웠다.

하지만 슘페터의 이야기에는 심각한 맹점이 도사리고 있다. 은행과 금융 부문은 오로지 이윤의 (그리고 위험의) 전망이라는 논리에 따라 작동하며, 이는 그 놀라운 힘의 원천인 동시에 뻔한 한계의 원천이기도 하다. 기술 혁명 초기에 생겨나는, 기존 사회적 수요에 크게 벗어나지 않는 자잘한 혁신들은 그 기대 이윤과 위험을 예측하고 계산하기가 쉬우므로 은행과 금융의 방법으로 자금을 융통할 수가 있다. 하지만 기술 혁명이 무르익으면 혁신이란 그 규모도 엄청나게 커질 뿐만 아니라 반드시 대규모의 사회적 변화를 수반하게 되므로 그러한 예측과 계산이 어려워지거나 사실상 불가능하게 된다. 게다가 문제는 이윤뿐만이 아니라 그러한 사회적 변화에서 발생하는 ‘사회적 비용’을 누가 지불할 것인지 과연 지불할 이가 있을 것인지 따라서 그러한 사회적 변화가 애초에 벌어지기는 할 것인지 등의 한없는 ‘불확실성’이 생겨나게 된다.

여기에서 케인스가 등장하게 된다. 이른바 ‘케인스주의’ 경제학과 달리, 그가 강조한 재정 지출 역할의 핵심은 유효 수요의 확장을 통한 경기부양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가 경멸해 마지않았던 ‘금융 시장의 합리성’을 넘어서서 사회를 풍요롭게 하는 것이 핵심이었다. 이성의 눈으로 볼 때 높은 사회적 가치를 지니며 또한 사회의 현재 상태에서 시급하고 중차대한 과제임에도 불구하고, 금융 시장을 지배하는 수익성의 논리에 막혀 아무도 돈을 대려고 하지 않는 도서관, 박물관, 미술관, 도시 환경 미화 등에 과감하게 돈을 쓰는 것이 재정의 역할이라는 것이었다. 당시 경제학의 용어로 표현하자면, ‘시장가치를 넘어서는 자연적 가치를 대담하게 창출하는 것’이었다.

지금 정부는 ‘4차 산업혁명’을 이야기하며 이에 맞는 사회 전체의 총체적 혁신을 촉구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균형재정 심지어 흑자재정을 고수하려 든다. 그렇다면 거기에 들어가는 자금과 비용은 민간과 해외의 은행과 금융 부문이 감당하는 수밖에 없다. 그러면 돈 되는 부문으로는 과잉 자금이 몰려 자산 가격 거품이 발생하는 한편 규모와 시간 지평이 긴 혁신 부문은 외면당하면서 필연적으로 병목이 발생할 것이다. 그리고 그에 수반되는 사회 파괴의 엄청난 비용과 고통은 완전히 방치 상태에 있게 될 것이며, 이는 심각한 사회적 마찰을 낳아 중장기적으로 훨씬 더 심각한 장애물이 될 것이다. 지금 택시 플랫폼을 둘러싼 사회적 갈등은 앞으로 엄청난 규모의 기술 및 사회 변화의 물결이 몰려올 것을 예고하고 있다. 혁신 성장이라는 말을 포기하든가 균형재정에의 집착을 버려라. 역설이지만, 과자를 먹으면서 아껴둘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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