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농단’ 핵심 인물인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60)이 재판부를 바꿔달라며 법원에 낸 기피사유서에서 윤종섭 재판장을 노골적으로 공격했다. 윤 재판장이 자신에 대한 유죄의 심증을 사적 모임에서 드러냈다는 ‘소문’이 있다면서 스스로 사법농단 재판 심리를 관두라고 요구했다. 30년간 법관으로 지낸 임 전 차장이 재판을 지연시킬 목적으로 ‘재판부 흔들기’를 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당장 다음주 예정된 재판도 모두 취소됐다.
7일 법조계에 따르면, 임 전 차장은 지난 5일 서울중앙지법 형사36부(재판장 윤종섭 부장판사)에 기피사유서를 냈다. 전체 106쪽 중 60여쪽에 걸쳐 임 전 차장은 재판부를 바꿔야 하는 이유를 상세히 밝혔다. 기피사유서 내용의 상당수가 임 전 차장 본인의 유불리에 따른 재판부 공격이다. 형사소송법 규정이나 일반 피고인 재판의 관행에 어긋나는 사유도 제시했다.
“강형주 전 서울중앙지방법원장이 주재한 모임에 윤 재판장이 참석해 사법농단 관련자들을 엄단해야 한다고 말했다”는 임 전 차장 주장이 대표적이다. 임 전 차장은 언론사 기자로부터 제보를 받았다면서도 언제, 어떤 과정에서 윤 재판장이 그러한 말을 했다는 것인지는 명확히 기재하지 않았다. 임 전 차장은 기피사유서에 “그것이 과연 근거 없는 헛소문에 불과한지도 의문”이라고 적었다. 스스로도 사실관계를 확인하지는 않았다고 인정한 것이다. 강 전 법원장은 양승태 전 대법원장 재임 시절 임 전 차장의 전임 법원행정처 차장으로 근무하면서 사법농단에 직접 연루된 인물인데 그가 주재한 모임에서 윤 재판장이 ‘엄단’ 이야기를 했다는 주장은 상식적이지도 않다.
그러면서 임 전 차장은 “재판장 윤종섭이 향후 유죄의 예단을 종국적으로 관철하려 하지 말고 스스로 회피를 한다면 피고인과 변호인이 기피신청을 유지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고 밝혀 윤 재판장이 스스로 이 재판을 맡지 않겠다고 선언할 것을 요구했다.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이 지난달 30일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연합뉴스
임 전 차장은 윤 재판장이 검사처럼 증인을 추궁해 증언을 번복시키고 진술을 강요하는 등 유죄라는 방향성을 갖는 질문만 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윤 재판장은 검사와 변호인·피고인이 증인을 먼저 신문한 뒤 재판장이 별도로 신문을 할 수 있다는 형사소송법 규정에 따라 증인에게 궁금한 점을 물은 것이다.
윤 재판장은 평소 재판 때 증인에게 ‘양심에 따라 숨김과 보탬이 없이 사실 그대로 말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위증죄로 처벌받을 수 있다’는 고지를 여러 차례 했다. 설령 윤 재판장의 질문이 피고인에 불리하게 느껴졌을지라도 증인이 사실대로 증언하면 실체적 진실 발견에 문제가 없다. 임 전 차장은 기피사유서에서 오히려 이같은 윤 재판장의 실체적 진실 발견을 위한 주의 조치가 법관 증인들이 허위 증언할 것이라는 예단을 드러냈다고 주장했다.
임 전 차장은 재판을 너무 자주 진행하고, 하루에 여러 명의 증인을 신문하는 게 부당하다고 지적했다. 피고인의 방어권을 제대로 행사하려면 재판에 대비할 시간이 필요한데 재판부가 이를 무시한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재판부는 ‘주 4회’ 재판을 해야 한다는 검찰 주장과 달리 임 전 차장 주장을 받아들여 ‘주 2회’ 재판 진행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향후 하루에 6명을 증인신문하는 기일도 있기는 하지만 중요도가 떨어지고, 각 증인별 신문에 소요되는 시간이 짧기 때문에 여러 명을 배치하는 게 가능했다.
기피사유서의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한 부분은 재판부의 추가 구속영장 발부다. 임 전 차장은 추가 구속영장 발부 사유가 무엇인지, 추가기소된 2건 중 일부에 대해서만 추가 구속영장을 발부한 이유가 무엇인지를 재판부가 설명해주지 않아 부당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임 전 차장에게 증거 인멸 염려가 있어 추가 구속영장을 발부했다는 사실을 고지했고, 그밖의 사정에 대한 고지는 의무사항이 아니다.
법조계에선 임 전 차장의 기피신청이 재판 지연 목적이라는 비판이 나온다. 임 전 차장이 기피신청서를 낸 지난 2일은 일제 강제징용 재판 관련 직권남용 혐의 심리를 대략 마무리하고,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재판 관련 혐의 등 새로운 심리로 들어가는 때였다. 시간을 벌기 위해 기피신청을 한 게 아니냐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
기피신청으로 재판은 중단됐고, 언제 재개될지도 미지수다. 검찰 관계자는 “임 전 차장 기피신청이 받아들여지면, 재판부가 유죄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는 판단이 드는 피고인들은 다 기피 신청을 해서 재판을 지연시킬 수 있는 것 아니냐”고 지적했다. 형사소송법은 소송 지연을 목적으로 하는 기피신청은 기각하라고 규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