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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녕대군의 두 얼굴

입력 2019.06.11 20:35

수정 2019.06.19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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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환의 흔적의 역사]양녕대군의 두 얼굴

“충녕(세종)에게 하늘도, 인심도 쏠린 것을 알고는 일부러 미친 척하면서….” 1879년(정조 13년) 정조의 글(‘지덕사기’)처럼 양녕대군 이제(李제·1394~1462)는 세종의 등극을 위해 일부러 미치광이로 살았다는 것이 여러 기록에서 보인다. <태종실록> 1418년(태종 18년) 6월6일자도 태종이 폐세자 양녕대군에게 “네(양녕대군)가 언젠가 나(태종)에게 ‘세자 자리를 사양하고 싶다’고 고한 적이 있지 않으냐”고 언급했다고 적고 있다. 하지만 태종-세종-문종-단종-세조실록을 읽으면 양녕대군의 행태가 너무도 몰상식적이고, 또 그 때문에 너무나 많은 주변 사람들이 죽거나 다쳤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남편 있는 여성(어리)을 빼앗아 아이까지 낳고, 큰아버지이자 2대 임금인 정종을 모신 기생(초궁장)을 농락했으며, 매형의 애첩(칠점생)까지 넘보았다. 양반댁 규수(방유신의 손녀)와도 강제로 사통했다. 이 과정에서 세자의 외도를 도운 어린 내관(이귀수) 등이 참형을 당했다. 심지어는 셋째아들(이혜)의 애첩까지 빼앗았고, 이 충격으로 셋째아들은 심화병(조현병)을 얻어 살인까지 저지르기도 했다. 또 세자와 사적인 친분관계를 맺은 구종수 3형제와 악공 이오방, 서방색 진포 등이 줄줄이 죽어나갔다. 심지어 어릴 적 자신을 금이야 옥이야 키워준 외삼촌 2명(민무회·민무휼)을 지목, “저들을 죽여야 한다”는 주청을 올리기도 했다. 태종이 어리를 내쫓자 세자(양녕대군)는 장문의 편지를 올려 “아니 전하의 여인들은 다 궁궐로 불러들이면서 왜 신(세자)의 여인들은 다 쫓아내느냐”고 직격탄을 쏘기도 했다. 어리는 훗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물론 이런 언행이 평생 칼끝을 걷는 듯한 위태로운 삶을 살아야 했던 양녕대군의 생존법일 수도 있다. 69세까지 천수를 누렸으니 말이다. 하지만 “너 때문에 죽임당한 자가 몇명이냐”(1418년 3월6일)고 질타한 태종의 목소리가 쟁쟁하다. 세자를 죽일 수 없는 노릇이니 주변 사람들이 너무 많이 죽거나 다쳤다. 결코 잘 산 삶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달리 생각해보면 만약 양녕대군이 조선의 제4대 임금이 됐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랬다면 ‘해동의 요순’ 세종을 만나지 못했을 것이고, 한글창제도 없었을 것이다. 뭇 인물들의 억울한 죽음은 세종시대의 개막을 위한 희생양쯤으로 여겨야 할 것 같다. 결코 억울한 죽음은 아니라는 것을 위안으로 삼아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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