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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마 그리운 비빔국수

입력 2019.06.13 20:34

수정 2019.06.13 2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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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일 셰프의 맛있는 미학]차마 그리운 비빔국수

1947년 여름, 몽양 여운형은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서 괴한의 총에 맞았다. 자택에서 기계면으로 만든 비빔국수를 점심으로 들고난 후였다.

이듬해인 1948년, 어느 신문 기사는 아마도 몽양의 식탁에 올랐을 당시의 유행 음식인 기계국수를 언급하고 있다. 정리하면 대략 이렇다.

“배급된 미국제 건면 조리방법은 냉수를 부어가며 속까지 익히고 삶은 후 찬물에 5분간 담가두었다가 장국이나 비빔국수를 해먹으면 좋다.”

[박찬일 셰프의 맛있는 미학]차마 그리운 비빔국수

일제강점기에 제분시설이 속속 한반도에 세워졌고, 몽양의 그 ‘기계면’도 이미 보급되기 시작했다. 우리가 아는 잔치국수가 바로 기계면의 일종이다. 제면기로 눌러 뽑는 국수가 흔했던 우리 전통 국수 문화에 이종(異種)이 이식된 셈이다. 가게에서 사들여 삶기만 하면 되는 간편한 기계면은 충격적이었으리라. 해방과 전쟁, 휴전으로 이어지는 동안 미국 원조로 받은 밀이 일제가 두고 간 적산(敵産) 제분공장에서 도정되었다. 동네 곳곳에는 제면기계를 갖춘 가내수공업 국수공장이 하나둘 생겼다. 원래 밀가루 국수는 오랫동안 양반과 부자들이나 먹을 수 있는 음식이었다. 옛 국수 조리법을 찾아보면 대개 소고기와 계란을 쓰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그러나 밀가루 원조는 국수 문화에 혁명적인 자극을 주었다. 국수는 고급 음식의 자리에서 내려와 누구나 먹을 수 있는 간이 음식이 되었다. 물론 비싼 고기 장국을 마련할 필요도 없었다. 값싼 멸치장국이 있었으니까. 비빔국수도 마찬가지였다. 쇠고기 고명을 쓰는 전통적인 비빔국수 대신 고추장과 간장으로 비벼 먹는 대중음식이 되었다. 사카린과 일본식 간장에 비빈 1950, 60년대식 비빔국수를 기억하는 노인들이 있을 정도다. 한국 음식사에서 밀가루 원조는 가장 파괴력 강한 사건이 아니었을까 싶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빵집 간판을 달아놓고 비빔국수와 만두, 밀가루 떡볶이까지 파는 집이 있었다. 분식의 대약진 시대였다고나 할까, 가만히 생각하니 그 시절을 관통해서 살아온 기억에는 늘 밀가루 음식이 한 자리를 차지한다. 특히 요즘처럼 더운 날에는 여름 별미인 비빔국수를 만들어 먹었다. 신 열무김치를 쓱쓱 썰어 넣고 설탕 친 고추장 양념에 제철 오이채를 올린 비빔국수의 맛. 삶은 계란을 고명으로 얹으면 더 완벽해졌다. 비빔국수의 맛은 어쩌면, 양푼에 국수를 버무리면서 떨어뜨리던 참기름 향에서 결판이 나는 것은 아니었을까. 어머니가 긴장한 표정으로 참기름 병을 살짝 기울여 몇 방울 떨어뜨리고는, 가차없이 주둥이를 닫아버리던 장면의 기억에서는 슬며시 웃음도 난다. 무엇보다 차가운 비빔국수를 만들자면 얼음이 필요했다. 얼음가게 아저씨는 톱으로 썬 얼음을 새끼줄에 매달아서 소년의 손에 들려 보냈다. 얼음이 녹을 새라 땡볕의 한길을 달리는데도 하나도 덥지 않았다. 어머니는 젊었고, 국수 맛은 아직도 혀에 또렷하게 남아 있다. 시절이 흘렀지만, 오늘의 젊은 어머니들이 새끼들을 먹이기 위해 국수를 삶고, 참기름을 칠 테지. 아아, 차마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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