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작품은 여러 측면에서 눈길을 잡는다. 처음에는 추상화, 특히 사유에 젖어들게 하는 명상적인 단색화처럼 읽힌다. 하지만 한 발 더 가까이 다가서면 화면을 세심하게 살펴볼 수밖에 없다. 재료도, 색감도, 그 구성도 흥미로워서다.
회화로도 도예로도 단정하기 힘들다. 흙과 불, 도공의 혼이 하나가 되는 전통 도예가 회화의 평면성과 절묘한 융합을 이룬다고나 할까. 1000년을 넘어서는 역사와 전통의 도예가 이렇게 현대미술로 진화·승화될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미술가 이흥복(59)이 ‘삶에 대한 기하학적 명상’이란 이름의 작품전을 열고 있다. 20일까지 아트파크(서울 종로구 삼청로)에서다.
전시장에는 팍팍하고 분주한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히면서 한편으론 작가의 자유분방함에 슬쩍 미소가 번지는 신작들이 선보이고 있다. 동행한 지인이 “볼수록 묘하게 끌리네. 도자편들이 지닌 독특한 맛과 멋 때문인가…”하고 진중해진다. 그의 작품은 회화같지만 실제론 수많은 도자 조각(작가는 ‘도자픽셀’이라 부른다)들로 구성됐다.
사실 이흥복은 30여년 흙과 불을 다뤄오는 도예가다. 경남 거창에서 가마를 짓고 작업을 하고 있다. 1990년대 미국 뉴욕의 프랫 인스티튜트 유학 시절에 그는 전통 도예를 어떻게하면 국제적이고 현대적 미감에 더 어울리는 작업을 할 수있을까 고민했다. 숱한 실험 끝에 입체의 도예를 평면의 회화와 결합시키는 데에 이르렀다. 도자픽셀들을 통해 현대적 미감의 입체적 회화, 즉 도예의 현대미술화다.
그의 작품의 독특함은 도자픽셀에서 나온다. 주로 사각형인 픽셀들은 조선시대 달항아리의 은은한 색감을 지닌 담백한 백자들이다. 여기에 구멍을 낸 것도, 구워지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또는 작가의 붓질로 선이나 기하학적 문양이 새겨진 것들도 있다. 작가가 만든 유약과 안료가 1200여도의 불 속에서 익어가며 특별한 색감을 지닌 도자픽셀도 있다. 때론 유머와 자유분방함이 드러나기도 한다. 흙과 불의 만남으로만 가능한 것들이다.
작가는 그렇게 구운 도자픽셀들로 화면을 구성한다. 작품에 따라 수십 개에서 수천 개 도자픽셀이 한 화면을 이룬다. 같은 듯 다른, 작가가 조형실험 끝에 얻은 다양한 질감과 색감의 도자픽셀들이 하나로 어우러지며 그 만의 작품세계가 구축된다. 삶과 세상에 대한 작가의 철학이 투영되는 것이다. 작가의 말처럼 “흙을 빚는다는 것은 곧 생명을 불어넣는 일”이기 때문이다.
수많은 도자픽셀이 서로 어우러져 드러내는 독특한 조형미는 사람 사이는 물론 인간과 자연, 나아가 우주 만물의 상생과 공존을 상징하는 듯하다. 저마다 개성있는 도자픽셀은 또한 개별 존재의 고귀함을 증명한다. 세심하게 조형된 작품은 결국 인간 삶의 존엄성을, 유구한 시간의 응축인 역사를 사유케한다. 이 작가는 “전통 도예를 현대미술로, 입체 세라믹을 평면회화로 승화시키고자 한다”며 “세라믹 아트의 새 지평을 여는 제 작업에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가져줘 국제적으로도 더 활발한 작업을 할 계획”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