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실도 애지중지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울진 | 글·사진 배문규 기자

경북 울진군 ‘전국 최대 금강송 군락지’로 말할 것 같으면

국내 최대의 금강송 군락지인 경북 울진군 소광리 금강소나무숲 초입에서 수령 537살로 추정되는 ‘500년송’이 굳건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국내 최대의 금강송 군락지인 경북 울진군 소광리 금강소나무숲 초입에서 수령 537살로 추정되는 ‘500년송’이 굳건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굵은 소나무가 대나무처럼 빽빽하게 서 있는 숲은 대한민국에 여기밖에 없을 겁니다.”

‘금강송면정류장’이라는 팻말만 붙어 있는 버스정류장에 내리니 사방을 병풍처럼 둘러친 산줄기가 눈에 들어왔다. 여름색이 짙어지는 산 능선에는 하늘로 곧게 뻗은 붉은 기둥에 푸른 불꽃이 일렁이는 듯한 소나무들이 빼곡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전국 최고, 최대의 금강소나무 군락지로 꼽히는 경북 울진군 금강송면 소광리의 모습이다.

지난 3일 산림전문가들과 둘러본 ‘소광리 금강소나무숲’은 조선시대부터 이어져오는 천연림의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소광리 금강송의 기세는 여전한 반면 다른 지역에선 시름시름 앓는 소나무들이 늘고 있다. 각종 해충의 공격에 더해 최근 심해지는 기후변화의 영향으로 생존이 위협받고 있는 것이다. 한국 소나무의 ‘최후의 보루’라고 할 수 있는 이곳에서 산림청과 녹색연합이 소나무를 지켜낼 최적의 생존 조건을 찾고 있다.

■ 조선왕실이 관리한 소광리 금강송숲

금강송면 소광리 일대 212㎢
최고령은 성종 때 싹 틔운 537살
나이테 1㎜, 일반 소나무보다 촘촘
온도 변화 적어 앉으면 ‘서늘’
“왜 궁궐 짓는 데 쓰는지 알겠죠?”

가도 가도 푸른 소나무의 물결이 이어졌다. 울진·삼척·봉화의 접경지역에 있는 소광리 일대는 국내에만 자생하는 금강소나무의 최대 군락지이다. 국내 최대 규모의 산림유전자원보호구역으로 지정됐으며, 총면적은 212.13㎢(약 6416만평)에 달한다. 2008년 국보 1호인 숭례문이 불에 타버렸을 때 소실된 건물을 복원하는 데도 소광리 금강송이 쓰였다.

서재철 녹색연합 전문위원의 안내를 따라 숲으로 들어가는 대광천 계곡 초입에 한자가 삐뚤빼뚤 새겨져 있는 자연석이 누워 있었다. 조선시대 ‘출입금지’ 표지판이다. “왕실에서 관(棺)을 짜거나 궁궐을 지을 때 쓰는 황장목(금강송)을 지키기 위해 일반인의 출입을 금한 ‘황장봉계표석(黃腸封界標石)’입니다. 구역이 사방 어디까지이고, 아무개에게 산지기를 맡겼다는 내용이에요. 전국의 봉산(封山) 중에서 표석이 두 개 발견된 곳은 여기가 유일합니다.”

금강송이 어떤 소나무이길래 왕실에서 관리한 것일까. 소나무를 부르는 이름은 다양하지만, 알고 보면 다들 한 식구다. 다만 형태나 특징에 따라 동북형·금강형·중남부평지형·안강형·중남부고지형으로 나눌 수 있다. 여기서 으뜸이 금강형, 바로 금강소나무다. 이름에서 보듯 금강산 줄기에서 백두대간을 따라 경북까지 분포한다.

금강소나무는 모양새부터 다르다. 용광로에서 막 나온 쇳덩이처럼 붉고 단단하며, 하늘로만 곧게 뻗어 있다. 눈이 많이 내리는 산지에 적응하다보니 가지가 옆으로 퍼지지 않고, 수형이 이등변삼각형처럼 날렵하다. 소나무전시실에 놓인 나무 샘플을 보니 목재로서의 차이도 확연했다. 일반 소나무의 나이테 간격이 5~10㎜라면, 금강소나무는 1㎜ 남짓으로 촘촘했다. 그만큼 재질이 단단하다는 의미다. 가격도 일반 목재의 15배에 달한다. 직경 70㎝에 높이가 30m 정도인 금강송 재적 4.36㎡가 소형차 한 대 가격에 팔렸다.

김정근 산림청 금강소나무생태관리센터 팀장이 손짓을 하더니 나무 위에 앉아보라고 권했다. 엉덩이에 전해지는 서늘한 기운에 깜짝 놀랐다. “왜 궁궐을 짓는 데 쓰는지 아시겠죠. 앉아보면 바로 압니다(웃음). 온도 변화가 적어서 더 시원한 느낌이 있어요. 황적색 빛깔과 나무결도 아름답고요.”

소나무처럼 많은 ‘애칭’이 붙은 식물이 있을까. 그만큼 예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고 값어치가 컸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한반도 소나무의 미래는 그리 밝지 않다. 당장 직접적인 위협으로는 소나무재선충, 솔잎혹파리 등 병해충이 있다. 여기에 여름철 폭염과 겨울철 혹한, 봄철 가뭄 등 기후변화로 인한 생육 스트레스도 생존을 위협하고 있다. 이미 아(亞)고산대에 사는 구상나무와 같은 침엽수들은 떼죽음을 당하고 있다. 소나무의 경우도 기후가 온대에서 아열대로 변하면서 남한에선 2060년, 한반도에선 2100년 이후에 모두 사라질 수 있다는 충격적인 전망이 나오기도 했다.

경북 울진군 소광리 일대 금강소나무 군락지에서 서재철 녹색연합 전문위원(왼쪽)과 백두대간수목원 변준기 박사가 금강소나무의 흉고직경을 재고 있다.

경북 울진군 소광리 일대 금강소나무 군락지에서 서재철 녹색연합 전문위원(왼쪽)과 백두대간수목원 변준기 박사가 금강소나무의 흉고직경을 재고 있다.

■ 금강송숲에서 ‘장수’ 비밀을 찾아라

산림청에선 소나무의 생태적 특징을 확인하고 체계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2013년부터 소광리에서 나무를 하나하나 살펴보는 현장 조사를 벌이고 있다. 튼튼한 금강송이 어떠한 환경에서 살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다. 이 소나무들만은 마지막까지 지켜내고, 다른 지역에서 복원 사업을 벌일 때 참고 자료로 삼으려는 것이다.

연구진은 2013년과 2015년에는 각각 500본, 2016년에는 1000본을 조사했다. 변준기 국립백두대간수목원 탐색보존팀장이 금강소나무 모니터링 방법을 시연했다. 흉고직경은 1.2m 높이에서 줄자로 측정한 나무 둘레를 기준으로 삼아 계산하고, 이어 나무로부터 10m쯤 떨어져 클리노미터라는 측정기로 나무의 키를 따져본다. 흉고직경이 91㎝, 수고는 30m 정도로 나왔다. 이 정도면 추정 수령이 300년 정도. 산 아래 동네였으면 보호수로 지정될 수준의 소나무였다.

주변 환경까지 조사를 마친 나무에는 추적 모니터링을 위한 금속 표찰을 달고 각종 정보를 식생조사표에 기록한다. 특이한 부분은 GPS 기기를 통해 소나무가 있는 지점의 위도, 경도, 해발고도 값을 함께 딴다는 점이다. GPS 위치정보에 금강소나무의 데이터베이스(DB)를 결합하면 구글지도에서도 각각 소나무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게 된다.

이렇게 파악한 소광리의 금강소나무 는 약 32만470개체. 수령별 흉고직경 범위를 추정해보니 39년 이하는 0~30㎝, 40~69년은 25~45㎝, 70~99년은 35~60㎝, 100~199년은 50~75㎝, 200년 이상은 60~80㎝ 이상으로 분류됐다. 수령별로는 39년 이하가 12만7670개체, 40~69년은 13만20개체, 70~99년은 4만2100개체, 100~199년은 2만770개체, 200년 이상은 500~1000개체였다.

연구진이 특별히 주목한 것은 흉고직경이 60㎝ 이상인 ‘대경목’이다. 최소 100년 이상 살았고 수고도 20~30m에 달하는 ‘잘 자란’ 나무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GPS 정보를 대입해 도출한 금강소나무가 가장 많이 사는 환경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았다. ‘고도 500~700m, 경사도 20~40도, 서식 방향은 남향, 지형은 능선.’

변준기 팀장이 ‘금강소나무 최적의 생존 조건’에 대해 부연 설명했다. “소나무는 햇볕을 엄청 좋아하는 극양수(極陽樹)에 속합니다. 사시사철 광합성을 해야 하니 해를 향해 키도 커지는 거고요. 그래서 햇빛이 잘 비치는 능선부에 주로 있는 것이죠. 침엽수는 참나무 같은 활엽수와의 경쟁에서 밀려나는 경우가 많은데 이 지역 자체가 소나무가 살기 좋은 조건으로 볼 수 있습니다.”

■ 꾸준한 생태연구 되어야 보전 가능

실제로 사면부를 따라 삐죽삐죽 올라온 어린 소나무들이 눈에 띄었다. 사람이 심은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씨가 퍼져 뿌리를 내린 것들이다. 이렇게 수십, 수백년의 시간이 누대에 이어지는 동안 금강소나무숲에는 ‘치성’의 대상이 된 나무들도 있다. 금강소나무숲에서 최고령인 ‘500년송’은 조선 9대 임금 성종 때 태어나 올해 537살로 추정된다. 우람한 가지가 뻗어 나온 모습을 선조들은 신령스럽게 봤을 법도 싶다. 금강송의 붉은 껍질에서 생명력 넘치는 잉어의 비늘을 떠올리기도 했다. 이 때문에 늘씬한 선이 고와 이름 붙여진 ‘미인송’은 아이를 낳게 해주는 인어아가씨로도 불린다고 했다.

소광리 금강소나무숲이 그나마 천연림으로 남아 있을 수 있던 이유는 무엇보다 이 지역이 ‘오지’였던 덕분이 컸다. 주변에 물길도 없고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보니 벌채를 해도 나무를 옮길 수단이 마땅치 않았던 것이다. 일제강점기부터 전쟁, 산업화를 거치는 동안 울창한 소나무숲은 사람들에게 또 다른 ‘노다지’였다. 태백산 일대에선 맹렬한 산판(벌목장)이 벌어졌다. 삼척에선 골짜기에 레일을 깔아 나무를 동해안까지 옮겼고, 봉화의 금강송에는 나무를 옮기던 역이름을 따 ‘춘양목’이라는 이름까지 붙었다.

자생 위협 해충·기후변화 맞서
당국, 수년째 최적 생존조건 찾기

수세기에 걸쳐 제 모습을 지켜왔던 숲들은 그렇게 수십년 만에 과거의 모습을 잃었다. 현재 소광리 금강소나무숲의 나무들은 보통 둘레가 1m를 넘고, 키는 20m, 수령은 60~70년이다. 이 숲이 조선시대 때 모습을 그대로 지켰다면 어떠한 모습이었을까. 앞으로 그러한 숲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는 있을까. 서재철 위원의 결론은 ‘알아야 지킨다’는 것이었다. “지난번 1000그루를 조사할 때 흉고직경이 100㎝ 이상인 나무는 단 한 그루만 나왔어요. 그 정도까지 자라는 것 자체가 생태적으로 쉽지 않지만, 결국 서식지 자체를 국가에서 관리해야 그런 개체들이 늘어날 수 있는 거죠. 소나무는 한민족에게 상징성이 크기도 하고, 한반도 생태계에서 중요한 나무니까 체계적으로 보존해 나가야죠.”


Today`s HOT
성모 마리아 기념의 날, 로마를 방문한 교황 영국에 몰아친 강풍, 피해 입은 지역의 모습 아우다비 그랑프리 우승자, 랜도 노리스 이색적인 '2024 서핑 산타 대회'
성지를 방문해 기도 올리는 무슬림 순례자들 올해 마지막 훈련에 참가하는 영국 왕립 예비역 병사들
모스크바 레드 스퀘어에서 열린 아이스 링크 개장식 시리아의 철권정치 붕괴, 기뻐하는 시리아인들
미국에서 일어난 규모 7.0의 지진 2024 베네수엘라 미인대회 많은 선수가 참가하는 FIS 알파인 스키 월드컵 훈련 5년 넘게 재건축 끝에 모습을 드러낸 노트르담
경향신문 회원을 위한 서비스입니다

경향신문 회원이 되시면 다양하고 풍부한 콘텐츠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 퀴즈
    풀기
  • 뉴스플리
  • 기사
    응원하기
  • 인스피아
    전문읽기
  • 회원
    혜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