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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쿨’한 재벌, 들불처럼 번지길

입력 2019.07.30 20:56

수정 2019.07.30 2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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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가 지속 가능해야 회사도 지속 가능할 수 있고, 개인의 행복도 담보될 수 있다.”(최태원 SK 회장)

“좋은 일 하는 기업이라는 공감을 고객, 임직원, 협력업체, 사회공동체로부터 얻어내는 것이 중요하다.”(신동빈 롯데 회장)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 가는 데 기여하는 것이 기업의 올바른 길이다.”(최정우 포스코 회장)

[오관철의 경제 단상]‘쿨’한 재벌, 들불처럼 번지길

최태원 회장을 필두로 국내에서 내로라하는 재벌, 대기업 회장들이 최근 연달아 던진 이 같은 발언들은 기업의 존재이유를 생각하게 한다. 물론 발언의 현실화 여부는 두고봐야 한다. 제도를 통한 행위의 규율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그럴듯한 수사에 그칠 것이라고 평가절하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시기에 이들의 발언을 주목할 수밖에 없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그간 문재인 정부의 경제정책을 친노동 대기업 옥죄기로 규정하면서 정부 때문에 경제가 거덜나고 있다는 맹목적 비난이 고조돼 왔다. 일본의 파렴치한 경제보복을 틈타 경제정책의 대전환이 필요하다며 재벌개혁을 후퇴시키려는 움직임도 있다. 대외 경제여건이 갈수록 험난해지고 기업 실적이 하강곡선을 그리는 상황이어서 기업은 이윤추구가 최고의 선이란 말로 구성원들을 독려하는 게 기업가의 당연한 책무로 여겨질 법한 시기다.

이들이 기업의 사회적 가치, 공감, 조화를 화두로 제시한 게 신선해 보이는 이유는 이런 작금의 상황과 무관치 않다. 많은 기업가들이 최저임금 때문에, 주 52시간 근로제 때문에, 경제민주화 입법 때문에 죽게 생겼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쿨하기조차 하다. “매출 극대화 같은 정량적 목표 설정이 안정성에 위협이 되고 있다”(신동빈 회장), “행복이라는 목표는 돈이 희생돼도 달성할 수 있어야 한다”(최태원 회장) 같은 파격적 발언도 있었다.

우리는 이윤추구가 기업의 사명이며, 기업은 이윤창출을 통해 경제발전에 기여한다는 명제를 오랫동안 거리낌없이 받아들여 왔다. 재벌이 돈을 버는 데만 몰두하고 성과를 사회에 돌려주는 데 미흡했지만 우리는 관대했다. 효율성을 최우선 순위에 두면서 초고속 압축성장을 하다보니 그럴 수 있으려니 했다. 지금도 크게 달라진 건 없다.

최태원 회장은 지난 18일 대한상의 제주포럼에서 박용만 상의 회장이 ‘그룹 안에 사회적 가치를 심겠다는 노력을 시작했을 때 임직원들이 가장 어려워했던 것이 뭐였는가’라고 묻자 “사회적 가치 경영방식을 주입하는 데 가장 어려웠던 건 임직원들 사이의 냉소주의였다. 부화뇌동하지 말고 하던 대로 하라는 식이었다”고 답변했다. 그의 발언이 비단 임직원을 향한 건 아니라고 본다. 여전히 사회적 기업이나 사회적 가치를 얘기하면 ‘좌파나 사회주의자 아니냐’ ‘문재인 정부와 코드를 맞추는 것이냐’는 얘기가 나오는 게 엄연한 현실이다. 최 회장의 발언은 이런 사회 일각의 기류를 읽었기 때문 아닐까 싶다.

경영학자인 마이클 포터 하버드대 교수가 공유가치창출(CSV)을 새로운 경영 패러다임으로 제안한 게 2011년 무렵이다. 기업이 이윤창출만을 위해 경영활동을 해서는 안되며,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데 이바지하는 경영활동을 두고 공유가치창출이라고 정의했다. 기업가들이 불법이나 탈법만 없으면 이윤을 창출하는 게 뭐가 문제냐, 고객 만족만 생각하면 되지 않느냐는 식으로 생각하는 시대는 오래 전에 지났다.

산업발전과 경제성장을 위해 재벌을 지원하고 이를 통한 낙수효과를 기대하는 과거의 패러다임으로 다시 돌아갈 수는 없다. 재벌이 스스로 개혁하면 가장 바람직하나 역사적 경험으로 볼 때 그럴 가능성은 높지 않다는 말도 가벼이 들을 수 없다. 시민들은 재벌이 부담은 국민과 나누고 이익은 독점하면서 어떻게 사회를 배신해 왔는지 목도해 왔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앞서 언급한 기업가들이 던진 화두는 가시적 성과로 이어져야 설득력을 갖게 될 것이다.

재벌은 더 낮아져야 하고, 사회 속으로 더 파고들어야 하며 사회적 난제를 푸는 데 적극 동참해야 한다. 시민들은 자동차, 스마트폰, 아파트에서 각종 생필품에 이르기까지 일상의 삶 속에서 재벌을 만나고 있다. 재벌은 이처럼 친숙한 존재임과 동시에 여전히 건전한 경제 생태계를 갉아먹는 괴물 같은 존재다. 재벌은 자신들이 보유한 자산과 역량을 양극화와 청년실업 문제 해소, 환경오염 같은 사회적 문제 해결에도 투입해야 한다.

돈에 초연한 쿨한 재벌이 많아지고 사회적 가치와 공감, 조화를 말하는 기업가들이 들불처럼 번져나가는 모습을 보고 싶다. 그리고 이런 기업가들은 재벌개혁의 편에 선 사람들을 반재벌운동을 하거나 반기업 정서를 가진 사람들로 매도하거나, 시장에 맡겨두면 모든 것이 나아질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과 거리를 두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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