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가 태어난 뒤 이름을 짓는 것이 제일 고민이었다. 이름이란 그 의미도 중요하지만 평생 다른 사람들에게 불리는 것이니만큼 시대의 유행도 고려해야 했다. 아내와 며칠 밤을 심사숙고한 끝에 어렵게 정했다. 그런데 막상 신고서를 써 내려가면서 선뜻 손이 쉽게 나가지 않았던 부분은 아이의 이름이 아닌 등록기준지였다. 등록기준지라는 것이 아이가 출생신고 당시에 살고 있었던 거주지 주소라는 행정적인 기록일 뿐이지만, 그래도 발음하기도 힘든 외래어로 된 아파트 몇 동 몇 호가 아이의 출생기준지가 된다는 것이 좀 낯설었다.
![[시선]마을에서 살다](https://img.khan.co.kr/news/2019/08/04/l_2019080501000368500028701.jpg)
엄마·아빠들이 모인 한 모임에서 “우리 아이의 이름을 불러주는 이웃이 10명이 있으면 참 좋은 마을”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곰곰이 머릿속에서 숫자를 헤아려 보았는데, 아무리 후하게 계산해도 우리 아파트에서 아이들의 이름을 알고 있는 이웃이 거의 없었다. 그나마도 같은 단지에 살면서 틈틈이 아이를 돌보아주셨던 돌보미 선생님이거나, 아이와 함께 외출할 때 초보 아빠의 서툰 행동을 보다 못해 손을 보태주셨던 미화원 아주머니들을 제외하고는 사실 다른 이웃들과 관계를 맺을 기회 자체가 없었다. 내가 살고 있는 곳이 이웃들과 만나고 관계 맺는 마을이라기보다 똑같은 성냥갑 모양의 숙박시설과 같다는 생각이 들어 서글퍼졌다.
얼마 전 성북구 정릉(貞陵) 근처 한 마을에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약속된 시간보다 좀 일찍 도착해서 마을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사실 서울 도심지에 ‘동네’라고 부를 수 있는 공간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은데, 정릉동은 아직 푸근한 동네와 골목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부인이었던 신덕황후의 무덤인 정릉은 조선시대의 왕릉 중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크게 조성되었지만 역사의 부침을 거쳐 지금 자리에 소담한 모습으로 남아 있게 된 이야기도 흥미로웠다. 그리고 1960년경 서울대가 성북구 동숭동(연건캠퍼스)에만 있던 시절에 서울대학교 교직원들이 이곳에 집단 주택단지를 조성했는데, 당시 대학교수들이 많이 살았던 이유로 지금도 여전히 “교수단지”라고 불리는 것도 재미있었다.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마을 곳곳에 꾸며진 꽃길과 정원이었다. 2008년 이 동네가 주택재건축 정비구역으로 지정되면서 마을에 갈등이 심했다고 한다. 골목과 동네에 담겨진 이야기보다 당장 눈앞의 이익을 좇아 성급하게 재건축사업이 추진되었다. 결국 2013년 법원은 재건축조합 설립에 중대한 하자가 있어 조합설립 인가를 무효로 한다고 확인하였고, 수십억원의 채무를 남긴 채 사업이 중단되었다. 이 과정에서 재건축에 반대하는 마을 주민들은 거친 구호보다 집집마다 대문에 꽃 화분을 꽃아 두거나 “초록이 물드는 마을”이라는 나무 문패를 만들어 붙이는 방법으로 마을살리기 의사를 표현해 왔다. 봄이면 자발적으로 집 담벼락과 골목마다 꽃길을 가꾸었고, 집 안뜰 정원을 주민들이나 마을을 방문한 외지인들에게 공개하면서 시작된 <정릉 교수단지 정원축제>는 서울의 대표적인 마을 축제가 되었다. 동네다운 동네였다.
최근 정릉에 다시금 재건축사업이 추진되고 있다. 추진위원회는 문화재위원회 심사를 통과하기 위해 고친 정비사업계획의 변경절차를 거치기도 전에, 주민들에게 “분양권을 2채 주겠다”는 등 듣기 좋은 이야기로 조합설립 동의서를 요구하고 있다. 세상에 공짜 돈은 없는 법인데, 과거 조합이 남긴 채무와 설립추진 과정에서 사용하고 있는 운영경비에 대한 부담 여부에 대해서도 묵묵부답이다. 참다못한 주민들이 성북구청에 집단민원을 제기했다. 오래된 마을을 고치는 것도 필요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 방법이 꼭 천편일률적인 아파트일 필요는 없다. 골목마다 가득한 추억. 바람에 실려오는 꽃의 향기와 오래된 나무의 기품, 그리고 서로를 이름으로 부르고 안뜰을 오가는 이웃주민들이 정릉의 최고 프리미엄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