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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매운동과 타인의 선택권

입력 2019.08.20 21:00

수정 2019.08.20 2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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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반도체 소재 수출규제로 국내에서 일제 불매운동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했을 때 불길한 전조가 아닐까 했다. 반일 감정의 광풍에 휩쓸려 민족주의 바람이 비이성적 양상으로 흐르지 않을까 하는 우려였다.

[오관철의 경제 단상]불매운동과 타인의 선택권

일부 경제전문가들도 냉정한 대처를 주문했다. “일본의 상식 있는 사람들까지 적으로 만들어서는 안된다” “감정적 대응이 오히려 일본의 우파에 힘을 보태줄 것이다” 등의 이유가 거론됐다. 일본의 수출산업이 부품·소재를 중심으로 구성돼 있기 때문에 소비재에 치중한 불매운동은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주기 어렵다는 분석도 나왔다.

지금의 양상은 사뭇 달라 보인다. 중국과 비교해 보면 알 수 있다. 영토분쟁과 일본의 역사왜곡에 맞서는 과정에서 중국 당국과 관영 매체는 대규모 반일 시위를 조장한 ‘보이지 않는 손’이었다. 식당에는 ‘개와 일본인은 출입금지’라는 간판이 등장했고 도요타 등 일제 자동차들이 시위대에 의해 파손되기도 했다.

한국의 불매운동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시민 개개인의 자발적 참여로 이뤄지고 있으며 시민 스스로가 무조건적 일제 불매를 경계하고 있다. 불매운동의 궤도 이탈을 막는 건 시민들의 현명함이다. 청소년과 2030의 호응이 높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최근 리얼미터 조사에서 20대의 56%는 일본이 경제보복을 철회해도 침략 사죄와 배상 때까지, 또는 그 이후에도 불매운동을 지속할 것이라고 응답했다. 전 연령대 중 유일하게 50%를 넘겼다. 한국의 밀레니엄 세대들은 기성세대에게 “어떻게든 해봐야 하는 거 아니오”라고 외치는 듯하다.

‘하다 말겠지’, ‘한국에서 불매운동은 단 한 번도 성공한 적이 없었다’, ‘한국은 원래 금방 뜨거워졌다가 식는 나라다’라는 식으로 불매운동을 비아냥거린 일본 언론과 경제계 인사들의 발언은 적어도 아직까지는 틀렸다. “한국의 불매운동이 장기적으로 매출에 영향을 줄 만큼 이어지지는 않을 것”이라던 유니클로 모기업 패스트리테일링의 고위 간부 발언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일본이 영원히 사과를 하지 않아도 계속해서 한국인들은 일본 제품을 사용할 것이란 오만은 꺾이고 있는 것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생전에 “우리는 단호히 일본의 옳지 못한 태도의 시정을 얻음으로써만이 진실로 영원한 양국 친선의 튼튼한 기초를 닦을 수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의 문화인류학자 루스 베네딕트는 1946년 발간된 <국화와 칼>에서 “일본인들은 자기 행동을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대해 놀랄 만큼 민감하지만, 동시에 다른 사람이 자기의 잘못된 행동을 모를 때는 범죄의 유혹에 빠지고 만다”라고 적었다. 또 “앞에 내보이는 한 손에는 아름답고 향기로운 국화를 들고 있으나 감춰진 다른 한 손에는 칼을 쥐고 있다”고 일본인의 특성을 정의했다. 불매운동이 왜 필요하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답이 되지 않을까 싶다.

물론 불매운동은 양날의 칼이다. 현장에서 피부로 차가운 바람을 맞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일본행 노선이 많은 저비용 항공사들은 영업에 직접적 타격을 받고 있다. ‘경제가 어려운데…’라는 생각은 여전히 저변에 흐르고 있다. 불매운동이 일본인들을 단합시키고 아베 정권의 지지율을 끌어올리는 데 악용될 수도 있다는 분석도 있다.

이번 불매운동이 얼마나 일본 극우세력을 각성시킬지는 우리 내부에 달려 있다. 불매운동에 대한 학술적 정의는 ‘소비자가 경제문제뿐 아니라 정치적·윤리적 문제 등을 해결하기 위해 특정 제품이나 기업, 정부 등에 대해서 자발적으로 구매를 포기하거나 다른 제품을 구매하는 사적 행동, 그리고 타인으로 하여금 동참하도록 홍보, 호소, 설득하는 공적 행동을 포함하는 총체적 행위’로 정리된다.

불매운동이 개인의 가치체계나 신념에서 비롯된다는 각도에서 보면 불매운동의 위험성은 우리 내부의 균열에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일제 불매운동의 동참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과도해지면 개인의 선택권을 침해할 수 있다. 경제적 논리로 불매운동을 중단해야 한다는 주장도 수용하기 어렵지만 불매운동이 민족의식을 재는 척도로 작용해서도 안된다. 어떤 의무감을 강조함으로써 다른 사람의 인식과 행동을 바꾸려는 시도는 한계가 있다. 불매운동이 일시적 집단심리의 발로라는 지적에서 벗어나려면 다른 의견과 그에 따른 의사 표현을 존중해야 한다.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기 위해 작은 불편을 감수하려는 시민들의 의지와 희생이 축적된다면 한·일 관계는 보다 정의로운 관계를 향해 나아갈 수 있다. 한·일 관계는 서로 관계가 좋을 때는 한걸음, 두걸음 나아갈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할 때는 한걸음 후퇴도 감내할 수 있어야 한다. 불매운동이 한국 소비자운동과 한국 시민사회의 성숙성을 보여주는 계기가 될 것이라는 점도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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