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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전주희 서교인문사회연구실 연구원

  • 전주희 고 김용균 특별노동안전조사위원회 위원

책임 공백·위계화 낳는 외주화 해체, 직접고용이 답이다

[특별 기고 - 김용균 특조위를 마치며…](4)전주희 서교인문사회연구실 연구원

김용균 노동자가 사망하기 일년 전, 태안발전소에서는 또 다른 하청노동자가 사망했다. 사고 당일 이른 점심을 먹은 노동자는 서둘러 작업을 시작했다. 하루 작업량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이 노동자는 미분기라는 설비 안에서 정비 작업을 하고 있었다. 바깥에 있는 또 다른 노동자가 그와 수신호를 주고받으며 작업을 할 때는 기계 작동을 멈추는 역할을 했다. 작업공간 높이는 140㎝ 남짓, 몸을 구부려야만 하는 공간이었다. 그런데 무슨 이유인지 알 수 없지만 안쪽에서 일하던 노동자가 허리를 곧게 폈다. 바깥의 밸브 조작자는 밸브를 작동했다. 미분기 안의 회전체가 노동자의 머리와 함께 회전했다.

사고 원인에 대해 발전소 측은 설비 안쪽과 바깥에서 일하는 노동자 사이의 ‘소통 문제’를 지적했다. 점심시간에 원청에 보고 없이 ‘임의로’ 작업한 것도 문제라고 했다. 하지만 바깥쪽 밸브를 조작한 노동자가 사고 당일 처음 발전소에 투입된 일용직 노동자였다는 점은 발전회사 측이 작성한 사고조사서에 기록돼 있지 않았다.

입사한 지 45일 된 하청노동자와 당일 투입된 일용직 사이의 ‘소통’을 사고의 원인으로 지목한 원청. 이 관계에서 소통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사망한 노동자가 왜 하필 허리를 곧게 폈는지, 왜 굳이 황금 같은 점심시간을 쪼개어 작업을 서둘렀는지에 대해 원청은 ‘작업절차 미준수’로 인한 ‘작업자 과실’이라 답했다.

외주화된 구조에서 소통은 원청과 하청 사이를 순환하며 위계를 만들어낸다. 소통을 강조하면 할수록 분할하여 잘려나간 공정들 사이를 메꾸기 위해 딱딱하고 획일화된 절차와 지시가 증식한다. 위계는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모든 목소리를 봉쇄할 때 완성된다. 위험의 신호는 위로 올라가지 못하고 하청노동자들 사이를 순환하며, 가장 밑바닥의 웅얼거림으로 가두어진다.

하청노동자들은 “위험하니까 설비를 개선해달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원청의 입장에서 설비개선 요구는 하청노동자의 권리가 아니다. 발전사 안전관리자는 “설비개선은 하청이 감 놔라 배 놔라 할 문제가 아니다”라고 딱 잘라 말한다.

가장 합리적이고 효율적이라고 간주된 ‘외주화’는 이러한 위계화를 전제로 작동된다. 그러니까 외주화의 합리성은 기업과 노동자 사이에 전대미문의 새로운 위계화를 만드는 것으로 보증된다. 전근대적인 지배에는 책임이라도 뒤따랐지만, 외주화된 구조에서 위계화는 책임의 내부를 허물며 책임의 공백을 형성한다. 정부는 책임이라는 앙상한 껍질은 남겨두되 책임의 속살을 파먹는 합법적인 외주화의 길을 열었다. 발전회사는 흐름공정을 분할하고 외주화하여 노동자의 삶을 파먹고 사는 거대한 촌충이 되어버렸다. 이 안에서 소통은 개인들의 능력이나 감수성이 아니라 구조화된 결과다. 동시에 이러한 위계적인 소통은 원청과 하청의 구조를 적극적으로 재생산한다.

김용균의 죽음에 대해 슬퍼하는 정규직 노동자는 하청노동자의 정규직화에는 난색을 표한다. “현장감독 업무를 해야 하는데, 같은 정규직이면 내 말을 듣겠어요?”라고 되묻는 입사 7년차 정규직 노동자가 경험한 발전소는 위계가 없이는 단 하루도 작동할 수 없는 현장이다. 그 안에서 김용균의 죽음에 진심으로 슬퍼했던 정규직 노동자가 할 수 있는 소통은 위계적인 것이 전부였다.

이러한 위계화는 원·하청구조의 가장 취약한 지점이자 내부로부터 지탱되는 근원이다. 이 때문에 외주화 중단은 위계화의 해체를 향해야 한다. 자회사 전환이 특조위의 권고안이 될 수 없는 이유다. 특조위는 하청노동자들의 고용안정을 권고한 것이 아니라, 위험의 내부적 해결을 위하여 미약하지만 중요한 출발점으로 직접고용을 권고했다.

김용균 이전에도 수많은 노동자들의 죽음이 있었다. 김용균 이전의 죽음들은 모두 ‘작업자 과실’을 뒤집어쓰고 발전소 안에 가두어졌다. 다만 김용균의 죽음만이 달랐다. 하필이면 김용균이 사망한 날, 전국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문재인 대통령과의 만남을 요구하며 서울에 모였다. 하필이면 그 자리에 눈물 많은 김용균의 동료가 비보를 듣고 울음을 터트렸다. 하필이면 김용균의 어머니가 김미숙씨였다. ‘하필이면’이 몇 번 겹쳐지면서 사고가 사건이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우연의 겹침은 매번 일어나지 않는다. 오늘도 발전소는 석탄을 태우고, 노동자의 삶도 태우며 전기를 만든다. 하청노동자의 직접고용을 권고하는 이유는 김용균의 죽음만이 발전소 바깥을 나왔을 뿐이고, 김용균의 동료들은 발전소 안에 여전히 살아 있기 때문이다. 또다시 ‘하필이면’의 겹침을 우리 사회가 기대하게 만드는 것은 잔인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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