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측 '북미 관계 전환(transform)' 표현 부각시킨 청와대 주장의 허점

김유진 기자

‘한미 정상, 대북 관계 ‘전환’ 합의’, ‘미, 북미 관계 ‘전환’ 예고’, ‘미, 북에 ‘관계 전환’ 메시지’….

어제와 오늘, 국내 거의 모든 신문과 방송의 헤드라인을 장식한 문구입니다. 지난 23일(현지시간) 뉴욕에서 만난 문재인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대북 관계를 획기적으로 ‘전환(transform)’시키기로 합의했다”는 내용인데요.

청와대는 백악관이 발표문을 영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transform’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면서, 큰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비핵화 협상에서 긍정적인 신호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인데요. 미국측이 ‘관계 개선(improve)’ 대신에 ‘transform’을 쓴 것을 두고 “대북 관계의 근본적 변화를 의미한다”는 해석까지 덧붙였습니다.

그런데 청와대의 설명에는 고개를 갸웃거리게 하는 대목이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우선 청와대가 주장하는 백악관의 발표문의 실체가 불분명합니다. 백악관이 낸 정상회담 결과 보도자료에는 ‘transform’이라는 단어가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북미 비핵화 협상에 관한 뉴스를 조금이라도 접한 사람이라면, 미국이 정말로 ‘transform’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한들 전혀 새로운 일이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북미 관계 전환’은 완전한 비핵화,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과 함께 트럼프 행정부가 추구해 온 대북정책 목표의 한 요소이기 때문이죠. 당연하게도 미국 정부 공식 문서나 고위 인사들의 발언에도 숱하게 등장한 바 있습니다. 청와대측 주장에 어떤 허점이 있는지를 따져봤습니다.

■백악관 발표문? 존재하지 않아

청와대는 백악관이 한미 정상회담 결과를 전하는 청와대 발표문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전환’을 ‘transform’으로 옮겼다고 주장합니다. 고민정 청와대 대변인은 정상회담이 끝난 뒤 발표문에서 “한미 양국이 북한과의 관계를 전환해 70년 가까이 지속된 적대관계를 종식하고 한반도의 항구적 평화체제를 구축할 의지를 재확인했다”고 밝혔습니다.

그런데 백악관의 한미정상회담 발표문에는 ‘transform’이라는 단어가 빠졌습니다. 청와대가 가리키는 ‘백악관 발표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분명하지 않은 셈이죠.

백악관 홈페이지에는 한미 정상회담에 앞서 문 대통령과 트럼프 대통령의 모두발언과 기자와의 문답이 원문 그대로 올라와있지만, 그저 문 대통령이 한 모두발언의 한 표현을 ‘transform’으로 옮긴 것입니다. 문 대통령의 실제 발언은 다음과 같습니다. “제3차 북미 정상회담이 열린다면 아마도 한반도에 비핵화의 새로운 질서가 만들어지는 아주 세계사적인 대전환(great transformation), 업적이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청와대가 이 문서를 의미한 것이라고 해도, ‘북미 관계 전환’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23일(현지시간) 미국 뉴욕 인터콘티넨털 바클레이 호텔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에서 기자들의 질문에 트럼프 대통령이 답변하는 동안 통역을 통해 내용을 듣고 있다. 뉴욕/연합뉴스

문재인 대통령이 23일(현지시간) 미국 뉴욕 인터콘티넨털 바클레이 호텔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에서 기자들의 질문에 트럼프 대통령이 답변하는 동안 통역을 통해 내용을 듣고 있다. 뉴욕/연합뉴스

■미 정부 공식 문서에서 확인되는 대북 정책의 핵심 목표

‘북미 관계를 전환하겠다(transforming US-DPRK relations)’는 것은 현 트럼프 행정부의 대북 정책의 일관된 기조이기도 합니다. 아시다시피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의 핵·미사일 실험이 고조된 2017년 북한에 ‘화염과 분노’를 터뜨렸지만, 2018년 문재인 정부의 한반도 평화프로세스가 본격 가동하면서부터는 대북 관여로 돌아섰죠. 그 이후, ‘북미 관계 전환’은 완전한 비핵화,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과 더불어 미국의 대북 정책을 구성하는 핵심 요소입니다. 지난해 6월 역사적인 첫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 이후 공동성명에 포함된 ‘새로운 북미관계 수립’과 연장선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북미 관계 전환’이라는 표현은 미 정부의 공식 문서에서 종종 등장합니다. 지난 2월 베트남 하노이에서 2차 북·미 정상회담이 열리기 전, 스티븐 비건 미 국무부 대북정책 특별대표가 평양으로 떠나 실무협상을 했습니다. 당시 국무부 대변인이 발표한 자료에는 아래와 같은 문장이 나옵니다. “스티븐 비건 대표와 김혁철 북한 대북특별대표는 싱가포르 회담에서 약속한 완전한 비핵화, 북미관계 전환(transforming U.S.-D.P.R.K. relations), 항구적 평화체제 구축에 관해 논의했다.”

‘북미 관계 전환’이 새로운 표현이 아니라는 점은 미 국무부가 지난해 9월 남북정상회담을 축하하며 발표한 성명(아래 사진)에서도 드러납니다.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은 지난해 9월19일 발표한 성명에서 “미국은 북미 관계를 전환시키기 위해 협상에 즉각적으로 관여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밝혔습니다.

지난해 9월 미 국무부가 마이크 폼페이오 장관 명의로 발표한 평양 남북정상회담 축하 성명.

지난해 9월 미 국무부가 마이크 폼페이오 장관 명의로 발표한 평양 남북정상회담 축하 성명.

■비건 대표 강연에도 수시로 등장

비핵화 실무협상을 이끄는 비건 대표의 강연에서는 ‘북미 관계 전환’이라는 표현이 더욱 자주 등장합니다. 비건 대표는 북미 대화의 중요한 고비마다 공개 강연을 통해 미국측 입장을 밝혀왔는데요. 가장 최근에 한 지난 6일 모교인 미시간대 강연에서도 5차례나 ‘북미 관계 전환’을 언급했습니다. 원문을 직접 보실까요.

“우리가 평화를 진전시키고 (북미) 관계 전환을 위해 중대한 걸음을 내딛기 위해서는, 북한이 완전한 비핵화를 달성하겠다는 약속을 지키겠다는 의지를 보여야 한다(For us to make progress toward peace and take major steps toward transforming our relationship, North Korea must also be willing to fulfill its commitment to achieve complete denuclearization).”

“(트럼프 대통령은) 우리 협상팀에 김정은 위원장과 싱가포르에서 합의한 대로 외교를 통해 북미 관계를 전환시키겠다는 약속을 실행할 것을 분명하게 지시했다(He has given our negotiating team clear instructions to deliver on his deep commitment to transforming U.S.-North Korean relations through diplomacy as agreed with Chairman Kim at Singapore).”

“양측 모두 (북미) 관계의 성공적 전환, 한반도에서의 항구적 평화체제 구축,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로 꽃피우게 될 기회를 포착할 수 있어야 한다(Both must be able to see opportunity where others inside their respective systems do not see; opportunity that could blossom from the successful transformation of our relations, the establishment of a permanent peace regime on the Korean peninsula, and the complete denuclearization of the Korean Peninsula).”

비건 대표는 지난 1월 스탠포드대 강연에서도 “싱가포르 정상회담의 목표들인 (북미) 관계 전환, 항구적 평화체제 구축, 완전한 비핵화를 병행해서 진전시키겠다”고 밝혔습니다. 당시 강연에도 ‘북미 관계 전환’이라는 표현은 7차례 들어갔습니다. 하노이 회담이 결렬된 이후 지난 3월 처음으로 가진 카네기평화기금 강연에서도 6차례 언급됐습니다. 직접적으로 ‘transform’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더라도, 북미 관계를 새롭게 만들어가겠다, 북미 관계의 궤도를 바꾸겠다 등의 표현은 이루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등장합니다.

스티브 비건 미 국무부 대북정책특별대표가 21일 오전 서울 종로구 세종대로 정부외교부청사에서 이도훈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과 협의를 갖기 위해 이동하고 있다. 김정근 선임기자 jeongk@kyunghyang.com

스티브 비건 미 국무부 대북정책특별대표가 21일 오전 서울 종로구 세종대로 정부외교부청사에서 이도훈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과 협의를 갖기 위해 이동하고 있다. 김정근 선임기자 jeongk@kyunghyang.com

■청와대 ‘무리수’ 왜?

그렇다면 청와대는 왜 ‘북미 관계 전환’이라는 표현이 미측의 새로운 입장인 것처럼 발표한 것일까요. 미국이 내놓는 공식 문서나 발언에 한 번이라도 주의를 기울였다면, 따로 주목할 만한 표현이 아니라는 것을 충분히 알았을 텐데도 말이죠. 기자들에게도 북·미, 한·미 정상회담에서 나오는 결과에 대해 양측의 공식 발표를 대조해서 살펴보는 것은 상식에 속합니다. 대미 외교 일선을 책임지는 정부 당국자들이라면 더더욱 날마다 촉각을 곤두세우고 미국이 발신하는 메시지를 원문과 대조해서 확인하겠죠. 청와대가 이번 한·미 정상회담을 치르면서 ‘북미 관계 전환’에 무리하게 의미를 부여한 이유가, 북핵 문제에서 성과를 내겠다는 조급증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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