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스’ ‘달항아리’ 등 20여점 선봬
김용진 작가(56)에게 철사는 작업의 시작이자 끝이다. 자신의 분신이자 붓이며 물감이다. 오직 철사만으로 달항아리를, 한 시대를 풍미한 국내외 인물들을 캔버스에 일일이 꽂아 빚어낸다. 수백~수천개의 철사가 그의 손을 거치면서 내공 깊은 붓질처럼 먹빛의 선, 면으로 살아난다.
보는 이가 무엇이라도 채울 수 있는 여백의 미까지도 드러난다. 수묵화 같지만 사실 철사로 김 작가의 조형의식이 만들어내는 형상이다. 딱딱하고 차갑다고 느껴지는 철사가 어떻게 이렇게 다가올까. 그의 작품을 만난 이들이 놀라면서 또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다.
김 작가 지난 20일부터 아트파크갤러리(서울 삼청로)에서 개인전 ‘지독한 캔버스’를 열고 있다. ‘지독한 작업’으로 이름난 그에게 어울리는 전시 제목이다. ‘달항아리’ ‘스티브 잡스’ ‘빌 게이츠’ ‘김구’ ‘마하트마 간디’ ‘프리드리히 니체’ 등 20여점의 작품을 선보인다.
그의 작업은 면벽 수도를 하는 수행자적 태도, 지극히 노동집약적으로 이뤄진다. 캔버스를 만든 뒤 여러 굵기의 철사를 다양한 길이로 자른다. 자른 철사를 꼬거나 그대로 쓰기도 한다. 그러곤 직접 만든 캔버스에 뚫어놓은 미세한 구멍들에 꽂는다. 박히는 철사의 간격, 높낮이, 크기 등에 따라 마치 먹의 농담처럼 밀도가 달라지며 명암과 공간감을 드러내는 독특한 분위기의 형상이 나타난다. 온몸과 정신을 오로지 작업에 던져야만 가능한 일이다.
개념미술이 유행처럼 퍼지는 미술계에서 그는, 그의 작품은 뜨거운 땀방울의 소중함, 노동의 가치, 수공예의 아름다움을 말없이 웅변하는 듯하다.
그의 작품이 주목받는 이유는 여러 가지다. 철사라는 특이한 재료도 하나지만 무엇보다 작품이 생각할 거리들을 던지고 있어서다. 작가는 철이라는 재료의 물성에 천착, 극단적 성질들을 오묘하게 조합해냈다. 딱딱하고 강한 철사에서 부드럽고 연한 성질을 끄집어내 공존시킨 것이다. 이성적 재료가 작가만의 조형의식을 통해 감성적으로 다가온다. 입체성과 평면성도 함께해 조각적 요소와 회화적 표현성이 어우러진다.
이번 전시는 미술계에서도 잔잔한 화제를 모으고 있다. 그야말로 지독하게 힘든 상황에서 이뤄진 전시회여서다. 8년 전 서울을 떠나 강원 고성으로 작업실을 옮긴 김 작가는 지난봄 강원 고성·속초를 휩쓴 산불에 집과 작업실이 불탔다. 다행히 일부 작품들은 따로 소장돼 화마를 피할 수 있었다. 절망적이었지만 그는 지인들의 격려로 오히려 불탄 작업실에서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전시명이 ‘불탄 작가 집에서 열리는 전시-김용진전’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서울에서의 전시회까지 초대된 것이다. 전시는 10월30일까지. (02)733-85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