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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태인 100년

‘신태인’ 역사는 역사(驛舍)에서 시작됐다. 호남선이 놓이면서 태인과 가까운 마을에 기차역이 생겨났다. 유서 깊은 태인이 인접해 있어 역 이름을 ‘새로운(新) 태인’이라 지었다. 1914년 1월 호남선이 개통되고 아주 작은 마을 ‘서지말’에 기적이 울렸다. 천둥소리보다 컸다. 철마는 거침없이 달려와 신식 물자를 내려놓았다.

[김택근의 묵언]신태인 100년

신태인역은 수탈의 거점이었다. 일제는 인근 곡창지대에서는 가장 큰 도정공장을 세웠다. 쌀이 모든 것을 지배하던 시기였다. 신태인으로 향하는 길마다 볏가마를 실은 수레와 마차가 줄을 이었다. 역 구내에 쌓여 기차를 기다리는 쌀가마가 하늘을 가렸다. 쌀이 흔하니 돈도 흔했다. 역 앞에 음식점, 술집, 잡화점, 약국 등이 들어섰다.

기적 소리는 모두를 들뜨게 했다.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신태인이란 역명은 1935년에 신태인면이란 지명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1940년 신태인읍으로 승격했다. 거의가 흘러온 사람들이었다. 유민들은 고향에 차마 묻지 못한 사연을 가슴에 품고 살았다. 건드리면 아팠다. 서로 과거를 묻지 않았다. 그래서 한국전쟁도 이곳에서는 많은 피를 쏟지 않았다. 뿌리 없는 사람들은 다시 뿌리내리기 위해 열심히 일했다. 평야라서 볼거리는 없었지만 노을이 내리고 동진강이 흘렀다. 고운 노을에, 어진 강물에 고된 하루를 씻었다.

1960년대는 ‘신태인 전성시대’였다. 인구가 3만명에 육박했다. 장날에는 장터가 터질 듯 부풀어 올랐다. 소시장이 특히 유명했다. 종일 소 울음이 낭자했다. 소를 사고파는 일이 엄중하여 어깨 벌어진 사내들이 소와 돈을 지켰다. 아이들은 시장 바닥에 떨어진 동전만을 주워서도 팥죽을 사먹었다. 극장이 우뚝 서고 목욕탕 3곳, 예식장 3곳, 다방 3곳이 생겨났다. 또 유곽(遊廓)도 있었다. 김제의 어느 땅 부자는 추곡수매가 끝나고 찬바람이 불면 신태인 유곽을 찾아왔다. 겨울 한 철을 기생과 함께 보내고 이듬해 모내기철이 되어서야 돌아갔다.

읍내에 초등학교가 4개나 있었다. 그럼에도 교실이 모자랐다. 한 반에 70명이 넘었고, 오전·오후반으로 나뉘어 수업을 받았다. 글 읽는 소리에 학교가 들썩거렸다. 운동회 날은 운동장이 시장터보다 더 붐볐다. 아이들보다 어른들 잔치였다. 기차는 쉬지 않고 달렸다. 신태인역에 해방, 전쟁, 새마을운동, 독재, 유신, 민주화운동을 내려놓았다. 천대 받은 전라도가 다리를 절며 내리기도 했다.

어느 때부턴지 기차는 신태인에 돈과 활기를 실어오지 못했다. 쌀과 기차는 ‘최고’가 아니었다. 더 이상 신태인을 떠받치지 못했다. 기적 소리가 자동차 경적보다 작게 들렸다. 돈 냄새에 민감한 시장통 상인들이 먼저 도시로 옮겨갔다. 이내 산업화, 도시화 바람이 불어왔다. 자식들이 고향을 떠났다. 누구는 공부하러, 누구는 취직하러, 누구는 무작정 기차를 탔다. 기적 소리가 슬픔을 머금었다. 자식들을 도시로 보내고 집으로 돌아오던 어머니의 어깨가 흔들렸다. 아버지는 처음으로 어머니 어깨를 감싸 안았다. 부모들이 갑자기 늙었다. 홀로 된 어머니들이 많아졌다. 빈집이 생겨났다.

작은 마을 사람들은 읍내로, 읍내 사람들은 정읍이나 김제로, 그곳 사람들은 전주나 서울로 빨려 들어간다. 돈과 사람이 있는 곳으로 다시 돈과 사람이 몰려간다. 2019년 가을, 신태인읍에는 5837명이 살고 있다. 4개 초등학교를 통합하고, 스쿨버스로 어린이들을 ‘모셔오는’데도 올해 입학생은 40명이었다. 이제 아기의 탄생은 아주 드문 일이며 마을뿐 아니라 읍내의 경사이다. 읍장이 케이크를, 이장이 미역을 사들고 달려간다. 신태인읍에 속한 11개 이(里)와 49개 마을에서 올해(9월 말까지) 태어난 아기는 13명이었다.

1940년 신태인과 함께 읍으로 승격한 영동, 예산, 금산, 보성, 장흥, 의성, 주문진은 어떤지 모르겠다. 철도의 고을 신태인보다야 낫겠지만 아마도 많이 수척해졌을 것이다. 서울특별시도 계속 특별할 수만은 없다. 벌써 여기저기 검버섯이 피어나고 있다. 지금 우리에게 엄청난 사변이 소리 없이, 천천히 다가오고 있다. 짐작하지만 소름이 돋아 확인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

신태인 100년, 이제 ‘새로운 신(新)’자에도 이끼가 끼었다. 극장도, 소시장도, 목욕탕도, 예식장도 사라졌다. 아기 울음이 끊긴 마을에는 어둠이 일찍 내린다. 지난 100년은 한줄기 섬광이었다.

그럼에도 고향의 시제는 현재이다. 안부를 묻지 않았지만 항상 곁에 두었던 고향, 그 속의 시간은 육화(肉化)되어 지금도 흐르고 있다. 기억하고 있음에 동진강은 노래이고, 노을은 기도이다. 빈 대합실에서 기차를 기다린다. 그대 고향은 무탈하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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