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아세요(?)”
소설 주인공 82년생 김지영은 같은 학원 남학생이 버스 정류장에서 치근댈 때 이 말을 확 내뱉고 싶었지만 그냥 삼켰다. 하지만 영화 주인공 82년생 김지영은 달랐다. 커피숍에서 1500원짜리 아이스커피를 쏟아 안절부절못할 때 맘충이라고 비아냥대는 남성들을 돌아보며 이 말을 쏘아붙였다.
![[아침을 열며]21대 국회, 초선 ‘김지영들’](https://img.khan.co.kr/news/2019/11/03/l_2019110401000253700018351.jpg)
여성들은 ‘내가 누구인지를 말하는’ 것조차 힘겹다. 심각한 일을 수백 번 당하거나, 아주 사소한 수백 가지 사건을 한두 번 겪거나. 여성들은 이렇게 성장한다. 이 때문에 뭐가 문제인지, 자신의 문제가 중요한지 판단도 어렵다. 일부는 김지영 일대기가 중산층 여성의 삶이라며 계급성을 따지고, 맘충이라 비하한 적 없다며 냉소적으로 대한다. 나는 이런 반응이 여성 서사를 존중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중산층 여성의 삶? 중산층이든 아니든 여성 서사가 이렇게 보편적인 공분을 불러일으킨 적이 있었나. 그만큼 여성들은 개별성을 보장받지 못했다는 증거다. 김지영도 ‘빙의’에 기대 겨우 자기 이야기를 했다. 자신은 맘충이라 비하한 적 없다는 남성들은 김지영의 남편 정대현으로 환원된다. 김지영이 “애를 낳으면 오빠는 뭘 잃어?”라고 묻자 정대현은 “친구들도 못 만날 거고, 회식도 편하게 못할 거고”라고 답한다. 직장과 미래를 다 잃을지 몰라 두려워하는 부인에게 겨우 친구, 회식이라니. 82년생 김지영이 누른 버튼은 자기 아내의, 동료의 고통을 방관해온 남성들에 대한 경고음이다. 그러니 더 고단한 여성, 더 가부장적인 남성도 있다는 말은 시대를 거꾸로 돌리자는 주장과 다르지 않다.
여야가 총선체제에 돌입했다. 이번에도 물갈이 열풍이다. 문득 ‘김지영’에게 정치를 맡기면 어떨까 상상한다. 21대 초선 국회의원 ‘김지영’. 김지영에 공감하는 수많은 ‘김지영들’이 국회로 들어오는 상상. 스스로의 존엄을 지키고 싶었던 김지영은 차별금지법, 생활동반자법부터 만들었다. 김지영 못지않은 당사자 서사를 가진 ‘김지영들’은 김지영이 대표발의한 법안에 이름을 올리고 본회의 통과까지 힘을 보탠다. 재선 의원 김은실(김지영의 직장상사)은 초선 ‘김지영들’과 국회 법사위원회에 계류 중인 성폭력 근절 관련법안 처리에 동분서주한다. 이들은 성인지 감수성이 낮은 편인 50대 이상 남성 의원들이 포진한 법사위의 위력에 굴복할 수 없었다. 김은실은 이전 직장에서 온갖 성희롱 수모를 견디며 팀장 자리까지 올랐다. 후배 여성들에 대한 미안함이 솟구칠수록 법사위원들의 사무실 문을 더 세게 두드린다.
왜 여성이냐고, 여성 정치냐고 되묻지 않았으면 좋겠다. 김지영들의 서사가 울려퍼지고 있고, 돌아보니 총선은 다가왔고, 초선 의원들의 불출마 선언으로 세대교체 여론도 커지고 있다. 나의 한발 후퇴가 상대의 완전한 승리로 결론나는, 그래서 차악을 선택해야 했고, 그 차악은 늘 남성이 주도하는 세상으로 귀결되는 정치를 막기 위해 선거제 개편까지 논의되고 있다. ‘조국 대전’ 와중에 여기자 성추행, 리얼돌 논란, 김학의 사건 등 여성을 억압해온 문제가 정쟁의 방패막이로 활용되는 현실 또한 여전했다. 이만하면 여성 정치에 온 관심을 쏟아부을 만한 때 아닐까.
말이 나온 김에 여성 정치 현실을 돌아보자. 20대 국회의 여성 의원 비율은 17%이다. 여성할당제가 처음 적용된 2004년 당시 13%와 비교하면 14년 동안 4%포인트밖에 늘지 않았다. 여성할당제는 의회권력의 최소 30%를 여성으로 채워 여성 대표성을 확보하려는 제도이다. 그런데 21대 총선을 앞두고도 여성할당제 30% 법제화 요구가 나온다. 이는 여성할당제가 남성 지분의 30%를 떼주는 제도였거나 아니면 주류 남성 정치인들이 자신들에게 편한 여성들을 선택하는 장치였음을 입증한다. 문화는 또 어떤가. 톨게이트 여성 수납원들의 정규직 쟁취 투쟁에서 보듯 여성들은 차별을 고발하기 위해 아직도 남성과의 신체적 차이를 드러내야 하는 방식으로 싸우고 있다. 참정권을 위해 여성성을 동원했던 19세기보다 나아졌다고 할 수 없다. 우리 사회가 아무리 압축 성장했다 해도 여성 정치는 유난히 세대 간 단절 현상이 심한 편이다. “나 젊을 때는 참고 살았어”라는 말을 안 듣고 자란 여성들이 몇이나 될까.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김지영과 김지영들은 “저 아세요”를 삼키고 있을지 모른다. 주저하지 마시라. 그대들의 외침에 ‘다시는 그전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권김현영 저서), “나도 페미니스트가 되려고 합니다”(<두 번째 페미니스트>, 서한영교)라는 응원이 보태지고 있다. 그러니 당당하게 외치시라, 물음표까지 빠뜨리지 말고 또박또박, “저 아세요?”라고. 이번엔 정치가 제대로 답할 차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