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년생 정대현’의 기막힌 타이밍

손희정 문화평론가

“79년생 정대현도 아프다.” 한 주간지가 영화 <82년생 김지영>의 주인공 정대현(공유)의 옆모습을 커버사진으로 다루면서 붙인 표제다. 어쩌면 이렇게 예상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가. 하지만 문득 이야말로 이 영화의 가능성과 한계를 함께 보여주는 문장이 아닌가 싶어졌다.

[직설]‘79년생 정대현’의 기막힌 타이밍

<82년생 김지영>은 여러모로 동명 원작소설의 미래형이다. 소설이 김지영의 빙의로 끝났다면, 영화는 소설이 끝난 그 자리에서 시작한다. 이제 가족들은 김지영의 ‘아픈 상태’를 알게 되었고, 그의 회복을 위해 마음을 쓰는 중이다. 영화는 고립되었던 김지영이 그들 덕분에 회복해가는 이야기를 그린다. 그렇게 경력단절여성 김지영은 고난을 극복하고 작가로 거듭난다.

이 작품을 미래형이라고 말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소설에 달린 악플 이후에 온 영화이기 때문이다. 감독은 그로부터 얻은 ‘교훈’을 잊지 않고 영화의 흥행 전략으로 삼았다. 그 결과 소설에서도 ‘꽤 좋은 남편’이라고 평가받은 정대현은 공유의 외피를 입은 더욱 선량한 ‘79년생 정대현’으로 거듭났다. 덕분에 수많은 정대현씨들의 공감을 얻을 수 있었다.

영화는 정대현의 이야기를 비중 있게 다룬다. 이는 확실히 영화의 덕목 중 하나다. 한동안 한국 상업영화에서 쭉 ‘보편 인간’이었던 남자는 이 영화에 이르러 드디어 성별화된 존재가 되었다. 그는 계급이나 역사, 대의 같은 다른 무엇이 아닌, 바로 가부장제 시스템 때문에 곤경에 처한 남성이다.

정대현은 공과 사의 영역 모두에서 남자 인간으로 그려진다. 특히 영화는 김지영의 가사노동에 정성스럽게 카메라를 들이대는데, 이는 김지영을 ‘여성’으로 만들고 정대현을 ‘남성’으로 만들었다. 김지영은 끊임없이 상을 차리고, 치우고, 아이를 돌보고, 빨래를 갠다. 정대현이 말로는 ‘위한다’ 하면서도 손 한 번 까딱하지 않을 동안, 김지영의 여성으로서의 노동은 계속된다. 두 사람이 한 프레임 안에 있기 때문에 정대현이 남성으로서 누릴 수 있는 ‘특권적 무심함’이 비로소 가시화된다.

이때 영화가 정대현이 무너지는 타이밍을 잡아내는 방식은 아주 절묘하다. 김지영이 자신이 아프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그 순간에 정대현이 울음을 터트리고 마는 것이다. 그러면서 “나랑 결혼해서 네가 아픈 걸까봐”라고 웅얼거린다. 이토록 끈질긴 “오늘 밤 주인공은 나야 나”라니. 사과하는 법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 그는, 미안함도 자신을 경유해서야 표현할 수 있다.

온갖 “○○년생 ○○○” 남자들을 보고 있자니, 현실도 이와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여자들이 성별화된 존재로서 자신의 현실을 깨닫고 입을 열기 시작한 순간, 남자들은 갑자기 ‘보편 인간’에서 ‘남자 인간’이 되어 남성으로서의 고충을 토로한다. 남성들이 경험하는 어려움에 공감할 때에도 머뭇거리게 되는 건 이 기막힌 타이밍 때문이다. 정말 변화를 원하는 건가, 아니면 역사의 스포트라이트가 여자를 비추는 것을 견딜 수 없는 건가.

동시에 이 장면은 만족스럽지 않다. 소설 속의 김지영이 온갖 여자들이 자신의 신체를 점유하도록 내버려둠으로써 정대현을 혼란의 시간 속에 가두어둔 것과 달리 영화 속의 김지영은 우는 정대현의 손을 너무 빨리 잡아준다. 그를 도닥여주는 대신 김지영이 제대로 발광했다면 어땠을까. 어째서 여자들은 언제나 남자들에게 “당신이 주인공이야”라고 말하는 존재여야 하는가.

이토록 ‘순한’ 김지영이 쓰는 글은 어떤 내용일까에 대해 생각하다가 마거릿 애트우드의 <그레이스>가 떠올랐다. 억울하게 죽은 친구가 빙의되어 때때로 다른 사람이 되는 그레이스. 그는 자신의 삶에 대해 말하면서 청자를 가지고 논다. “내가 당신이 생각하는 그 여자일까, 아닐까?” 그러면서 그레이스의 이야기는 19세기 말 캐나다에 살고 있는 하층계급 여성으로서 그가 겪어야 했던 일을 당연하게 여기는 사회적 통념을 가차 없이 공격한다.

그렇다면 지금 김지영이 화사한 얼굴로 써내려가는 글은 과연 무엇을 공격할 수 있을까? 물론 그가 글을 쓰기 시작했다는 것 자체가 그야말로 분투의 결과이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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