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면 1#: 1990년대 초 미국 중심의 국제정치학계는 큰 충격을 받았다. 소련 및 공산권의 몰락이라는 대사건을 예측도 분석도 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이후의 세계질서가 어떻게 될지, 또 어떠한 질서를 지향해야 할지에 대해서도 전혀 할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에 국제정치학 무용론이 나왔고, 특히 국제정치이론이라는 것이 쓸모가 있는지 심지어 그런 게 있기는 한 건지라는 목소리가 쏟아져 나왔다.
중요한 점은, 이러한 목소리를 쏟아놓은 이들이 모두 국제정치학자들이라는 것이었다. 이들은 1990년대 내내 “국제정치이론은 존재하는가? 쓸모가 있는가?”라는 물음을 새로운 레퍼토리로 삼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유수의 학술지들은 모두 이러한 주제로 특집 논문을 싣기 시작하였고, 또 이 주제로 큰 학술대회가 개최되기도 하였다. 실로 진풍경이었다. 하지만 부조리극은 아니었다. 그 덕에 이 학자들과 학회들은 이 새로운 주제를 내걸고서 또 많은 연구 프로젝트를 제출하여 또 많은 자금을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장면 2#: 세월호 사건 이래로 ‘기레기’라는 아주 험한 말이 등장하였다. 이 짧은 외마디에는 그동안 누적되어 온 언론 매체와 기자들에 대한 사람들의 불신이 들어 있었다. 불편부당한 관찰자이자 진실을 추적하는 존재라는 것을 내세워서 사회의 온갖 명예와 무형적 권력은 다 챙겨놓고서 이를 팔아 자기들의 정치적·물질적 이익을 가혹하게 추구할 뿐만 아니라 그 와중에 공익과 약자들을 무참하게 짓밟는 자들이 아니냐는 매서운 비판이요, 분노가 담긴 말이었다.
중요한 점은, 이번 조국사태를 거치면서 이 ‘기레기 담론’을 생산·재생산하는 주체가 공중파와 일간지를 포함한 주류 매체가 되었다는 것이다. 험악하기 짝이 없는 담론 지형에서 자신과 자기 소속 매체의 이익을 생각하느라 눈치 보기에 여념이 없었던 매체들은 유리하다 싶은 기사들을 쏟아놓으면서 정작 보도해야 할 중요한 사실들은 외면하거나 아예 왜곡하기까지 했다. 기사의 총량은 불어났지만, 잡음만 가득하고 정말로 의미있는 정보와 견해가 전달되는 일은 드물었다. 당연히 이러한 행태를 놓고 기레기라는 비판이 범람하게 되자, 이들은 놀랍게도 스스로 그러한 기레기 담론에 편승하여 이를 또한 레퍼토리로 삼기 시작한다. “모든 사람은 죽는다”라는 명제를 입에 올리는 이는 자기가 불사의 존재가 되는 착각에 빠진다는 게 하이데거의 독설이었다. 이들은 이제 스스로 기레기 담론을 떠들면서 이를 자기들의 알리바이로 삼는 기묘한 유체이탈의 기술을 선보였다.
장면 3#: 이번 총선의 화두로 86세대 청산이 떠올랐다. 지난 몇 달 동안의 내홍을 겪으면서 이른바 ‘진보’라는 86세대에 대한 국민적 환멸과 불신이 극에 달한 상태가 주요 원인이리라. 여야 할 것 없이 불출마 선언이 줄을 잇고 있으며, 이는 특히 집권 여당 내부에 포진한 86세대 정치인들에 대한 퇴진 압력으로 작동하고 있는 것 같다.
중요한 점은, 이 담론과 움직임을 만들고 이를 다시 확대재생산하는 이들이 바로 86세대 정치인과 언론인 본인들이라는 것이다. 내가 알고 있는 바로, 그 위 세대도 아래 세대도 86세대의 물리적·생물학적 청산을 요구하는 움직임을 크게 만들지 않았다. 11월 들어 뭐라 말할 게 없어 머쓱해진 86세대 정치인 본인들 스스로가 이야기를 꺼내고 또 스스로 여러 움직임을 벌이는 자작극에 가깝다.
당신들은 이런 말과 행동을 할 자격이 없다. 첫째, 86세대의 청산은 86세대가 떠들고 실행할 몫이 아니다. 우리는 바보가 아니다. 그 뒤에 벌어질 드라마가 너무나 뻔하다. 털고 나온 86 정치인들은 방송계나 업계 비선출직 공직 등등으로 흩어져서 더 큰 영향력과 재력을 축적하면서 정치 복귀에 유리한 시점만 간 보는 ‘실질적 정치인’으로 남을 것이 분명하다. 게다가 그 뒤를 이어 나오는 ‘청년정치인’이라는 이들도 물리학적인 나이가 30대일 뿐 줄 잘 서고 판 잘 읽는 재주 하나에 기대어 기존 정치판과 권력 구조의 권력 문법에 익숙하게 하나가 된 이들이 대다수일 것이다. 둘째, 86 정치인들은 지금 이렇게 편안한 퇴로를 걸을 때가 아니다. 기후위기와 극심한 불평등이 덮치고 있는 지구촌의 현실에서 지금 미국에서는 워런과 코르테스 같은 이들이, 영국에서는 코빈 같은 이들이 새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 파격적인 내용을 들고나와 혼신의 힘을 쏟으며 분투하고 있다. 알량한 민주화 경력 하나를 자산으로 지난 몇 십년간 온갖 기득권과 유·무형의 정치 자산을 독점해 온 당신들은 마지막으로 이렇게 굵직한 일을 하면서 갖은 고초를 당할 의무가 있다. 사약을 내릴지, 귀양으로 끝낼지는 그걸 보고서 국민들이 결정할 일이다. 뻔한 사표쇼는 그만두고 제대로 할 일을 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