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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에 대한 범죄

프란치스코 교황의 행보는 자주 사람들을 놀라게 한다. 지난주에는 교황이 가톨릭 교리에 ‘생태에 대한 죄악’을 포함시키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반쯤 졸던 눈을 번쩍 떴다. 역시 프란치스코 교황이다. 가톨릭에서 ‘죄악’을 재정의한다는 것은 그리 가벼운 일이 아니다. 전 세계 신자들의 행동지침과 교회의 지향점을 새로 제시하는 일이니까. 교황이 예전에 했던 말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신은 용서해도 자연은 우리를 용서하지 않을 겁니다.”

[산책자]생태에 대한 범죄

교황은 대기, 수질 오염과 동식물의 대규모 파괴를 ‘생태학살’이라 부르며 그런 행위를 저지른 기업에 대한 처벌이 필요하다고 했단다. 또 환경파괴 행위를 ‘평화에 반하는 범죄’로 불렀다고도 한다. 나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말이 언제나 정곡을 찌른다고 생각해왔다. 교황은 가톨릭 전례력에서 연중 마지막 주인 지난 주일을 ‘세계 가난한 이의 날’로 정하기도 했다. 교황은 말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단 한 사람이라도 가난한 이를 친구로 두고 있는지 자문해보십시오.”

교황이 생태학살을 비난하며 그 주범을 ‘기업’이라고 적시한 것, 또 환경파괴를 ‘평화’에 관한 문제로 본 것에 대해선 더 보탤 말이 없다. 현재 시시각각 닥쳐오는 기후재앙의 진원지가 평범한 개인보다는 지구 전체를 대량생산과 소비 시장으로 바꿔놓은 기업에 있는 게 분명하니까. 또 오늘날의 평화가 단지 전쟁이 없는 상태라는 소극적 의미를 넘어 인간 사이의 평등은 물론, 인간-자연의 관계까지 포함한다는 것도 유념할 만하다.

나는 지난해 말 경향신문 지면에 실렸던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의 인터뷰 내용 중 한 대목을 지금도 기억한다. “외부와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을 차츰 상실해가는” 것에 우리의 진짜 문제가 있다는 말. 현대 경제체제 이전에는 인간들이 서로에게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고, 내가 살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의 몸과 마음이 꼭 필요했는데, 이제 사람들은 서로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자연에서도 떨어져 나가고 동물의 고통과 식물에서도 단절되어 버렸다는 얘기다. 자연과 단절되어 버린 채 냉온방이 완비된 도시의 콘크리트 속에서, 세상에 가난이란 없는 양 그런 친구 하나 없이 살아가는 이 무감각이야말로 우리의 가장 큰 불행인지도 모른다.

나는 이 칼럼에서 기회 있을 때마다 기후위기나 환경파괴를 주제로 글을 썼다. 무명 필자의 변변치 못한 목소리를 가지고 기대하는 바는 없으나, 요즘은 이런 글이 아니어도 매일 한두 번은 기후나 환경 관련 보도를 접할 수 있다. 지구 자체의 피드백으로 인해 더 이상 온난화를 막을 수 없는 시점이 2030년에서 2020년으로 앞당겨졌다는 과학자들의 연구, 2050년에 10억명의 기후난민이 발생하고 뭄바이, 자카르타, 방콕, 홍콩 등의 해안 도시들이 모두 물에 잠길 것이라는 호주 국립기후보건센터의 보고가 그런 것들이다. 이렇게 매일처럼 기후 경고가 쏟아짐에도 사람들은 왜 이리 태평한 것일까? 절망스러운 것은 기후변화 자체보다 오히려 사람들의 이런 태평함이다.

그 연유를 따지다 보면 역시 프란치스코 교황이 말한 관계의 단절이나 노르베리 호지가 말한 감각의 상실에서 원인을 찾게 된다. 우리는 사람들 사이에서 관계로 살아가는 ‘人間’이기를 멈추고, 제각기 외로이 흩어진 사물로 추락해버린 것 아닐까. 우리는 이미 병들어버렸는지 모른다.

집 또는 살림살이를 뜻하는 그리스어 오이코스(oikos)는 재미있는 단어다. 영어의 경제(economy)와 생태(ecology)가 이 말에서 나왔다. 생태 지속성을 가로막는 것은 같은 배에서 나온 경제라는 쌍둥이다. 우리가 경제에게만 계속 밥을 준다면 다른 형제는 굶어죽을 수밖에 없다. 한정된 지구 자원으로 어떻게 끝없는 경제 성장이 가능한지, 경제학이라는 요설이 이 뻔한 거짓말을 현란하게 꾸며 우리에게 최면을 건다.

최근 인류학, 철학, 사회학 분야에서는 자연과 물질을 하나의 행위자로 보고 인간과 함께 세계와 사회를 구성하는 주체로 인정하는 탈인간주의(post-humanism)의 흐름이 한창이다. 이런 자각 때문인지 에콰도르는 이미 오래전에 인권과 동등한 의미의 ‘자연권’을 헌법에 명시했고, 볼리비아는 ‘어머니지구권리법’을, 독일은 ‘생명의 자연적 기반과 동물을 보호할 책임’을 헌법에서 국가에 부여했다. 1980년대 말 아마존 벌목꾼들에게 살해당한 브라질의 환경운동가 치코 멘데스는 열대우림을 지키려는 이유가 소작농과 토착민의 삶을 지키기 위해서임을 분명히 한 바 있다. 성장이 우리를 죽일 것이고, 약자들부터 가장 먼저 죽일 것이다. 평등, 평화, 생태는 한 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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