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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향미의 '찬찬히 본 세계']혐오의 물살을 거슬러 광장으로 나온 이탈리아 정어리떼

이탈리아에서 ‘정어리떼 시위’를 제안한 마티아 산토리(맨 앞줄)가 지난 24일(현지시간) 에밀리아로마냐주 레지오에밀리아에서 시위 참가자들과 함께 ‘정어리’를 소재로 한 시위 소품을 들어보이고 있다.  레지오에밀리아 | 로이터연합뉴스

이탈리아에서 ‘정어리떼 시위’를 제안한 마티아 산토리(맨 앞줄)가 지난 24일(현지시간) 에밀리아로마냐주 레지오에밀리아에서 시위 참가자들과 함께 ‘정어리’를 소재로 한 시위 소품을 들어보이고 있다.  레지오에밀리아 | 로이터연합뉴스

“혐오정치, 이제 그만!”

이탈리아 중부 에밀리아로마냐주의 도시 리미니에 지난 24일(현지시간) 밤 ‘정어리’ 떼가 출현했다. 은유적 표현이지만, 스스로 정어리(sardine)라 칭하는 시민 7000여명은 극우정치인 마테오 살비니에 반대하기 위해 거리로 나왔다. 이탈리아·독일·스페인 등 유럽 정치권에서 극우세력이 힘을 얻고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자이르 보우소나루 브라질 대통령 등 극우정치인들이 연일 혐오 발언을 쏟아내는 시점에 ‘정어리떼 시위’는 극우주의와 혐오정치를 막아내겠다는 시민들의 자발적인 움직임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이탈리아는 물론 해외에서도 이들의 활동에 호응을 보내고 있다.

라레푸블리카 등 현지언론을 보면 이날 리미니 카보우르 광장에는 정어리를 활용한 여러 시위 소품들을 들고나온 사람들로 가득 찼다. 정어리떼 시위 최초 제안자인 마티아 산토리(32)가 “광장은 우리의 것, 정치는 우리의 것”이라고 외치자 시민들은 박수로 화답했다.

정어리떼 시위는 지난 14일 볼로냐에 살고 있는 30대 시민 4명이 페이스북을 통해 반극우 시민운동을 제안하면서 시작됐다. 수백만 마리가 한꺼번에 몰려다니며 덩치 큰 물고기와도 맞서는 정어리떼처럼 다수 시민의 힘을 보여주자는 취지에서 이런 호칭이 만들어졌다. 이들은 페이스북에 ‘6000 정어리’란 계정을 만들고 사람들의 참여를 독려했는데, 첫 집회에서만 1만2000명이 넘는 시민들이 모였다.

이어 18일엔 모데나에서 7000여명, 23일 레지오에밀리아에서 8000명가량이 집회에 참여했다. 레지오에밀리아 시위에 참여한 가이아 란디니(30)는 “소셜미디어에는 증오가 너무 많다. 극우정당이 갈등을 조장하며 번창할 때 우리는 ‘아니오’라고 외쳐야 한다”면서 “(혐오는) 이미 충분하고, 사람들은 감각을 되찾았다”고 로이터통신에 말했다. 산토리는 “우리의 ‘생각’으로 포퓰리즘의 용과 싸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이런 시위를 제안했다고 말했다.

정어리떼가 겨냥한 살비니는 ‘이탈리아 우선주의’를 내세우면서 이민자 혐오 발언을 서슴없이 쏟아내는 인물이다. 내년 1월 에밀리아로마냐주 지방선거를 앞두고 최근 살비니가 이끄는 극우정당 ‘동맹’이 오성운동과 민주당이 손잡고 구성한 연립정부를 위협하고 있다. 에밀리아로마냐주는 2차 세계대전 이후 공산당이 주정부를 장악해 역사적으로 좌파 세력이 우세를 유지했던 지역이다. 볼로냐대 비교정치학 교수인 피에로 이그나치는 “이 지역에서 극우정당이 이긴다면 더 이상 살비니를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고, 주민들에겐 재앙과 같다”고 말했다.

‘극우주의와 혐오정치’에 반대한다는 정어리떼 메시지가 호응을 얻으면서 더 많은 사람들이 광장으로 나오고 있다. 에밀리아로마냐주를 넘어 남부 시칠리아주 팔레르모에서도 지난 22일 밤 시위가 열렸고, 수도 로마에서도 다음달 14일 시위가 열린다. 페이스북 ‘6000 정어리’를 보면 이탈리아 곳곳에서 시위가 예고됐다. 미국 뉴욕과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등에서도 같은 목소리를 내기로 했다. 이 계정 팔로워는 25일 현재 15만2000여명이다.

젊은층을 중심으로 시작됐지만, 중장년층도 정어리떼에 합류했다고 이탈리아 ANSA통신이 전했다. 67세의 한 시위 참가자는 “나는 나폴리의 한 마리 정어리”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또 다른 시위 참가자 스테파노 페라리(46)의 말은 시위의 성격을 압축한다. “정치성향이나 인종과는 상관없는 문제다. 우리는 분열의 정치를 끝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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