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하산으로 갈 수 있는 최고의 자리’ ‘정권이 바뀌면 바람 앞 등불 신세’ ‘논공행상의 대상’…. 통신업계 맏형으로 불리는 KT 회장 자리에는 이런 불명예스러운 꼬리표가 따라다녔다. 2002년 완전 민영화 후 정부 지분이 0%인 회사지만 기이하게도 정권 차원의 후원 없이는 오르기 힘든 자리였다는 뜻이다.
KT가 이런 오명을 벗어던질 수 있을까. 현재 진행 중인 황창규 회장 후임 선출 과정에 재계의 이목이 쏠리고 있다. KT처럼 ‘공민기업(공기업에서 민영화된 기업)’인 포스코 역시 선출 과정을 주시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문재인 정부 들어 ‘KT 회장 자리는 정권이 바뀌면 바람 앞 등불 신세’란 꼬리표는 뗐다. 2017년 3월 연임에 성공한 황 회장이 중도 하차하지 않고 내년 3월 임기만료를 앞두고 있는 것이다.
황 회장은 KT 경영고문 부정 위촉 사건으로 경찰 수사를 받는 등 공과에 대해선 논란도 있다. 하지만 2017년 5월 문재인 정부 출범 후 자리를 지키고 있음을 감안하면, 정권교체 시 새로운 수장이 위에서 내려오면서 타의로 물러나야 했던 전임 회장들과는 달랐다.
또 하나의 과제는 그간 반복적으로 나타난 권력 개입을 차단할 수 있을지, 정권 실세와 가까운 인사가 낙하산으로 내려왔던 과거와 단절하면서 새로운 회장 선출 모델을 창출할 수 있을지 여부다. 차기 회장으로는 전·현직 임원과 외부 인사를 포함해 37명이 경쟁하고 있다.
KT 회장 선출의 1차 관문은 현재 진행 중인 이사회 지배구조위원회의 서류 심사다. 몇 명으로 압축할지는 아직 미지수이나 조만간 5명 수준으로 추려질 것이란 말이 나온다. 이어 회장후보심사위원회, 이사회를 거쳐 이르면 연내 최종 후보를 결정할 것으로 보인다. 회장후보심사위는 사외이사 전원(8명)과 사내이사 1명으로 구성된다.
KT 안팎에선 아직까지 정권 차원의 노골적 개입은 눈에 띄지 않는다는 평가가 많다. KT 관계자는 “청와대는 개입할 의지가 없어 보인다는 게 정설이다. 내년 4월 총선이 있고, 친여 인사가 입성할 경우 관치인사란 비판에 직면할 것이란 점에서 여당도 자제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으로는 보이지 않는 손이 어른거리는 것 또한 부인하기 어렵다.
회장후보심사위에 들어가는 김대유·이강철 사외이사가 참여정부 시절 청와대 경제정책수석과 시민사회수석을 지냈고 정동채 전 문화관광부 장관, 노준형 전 정보통신부 장관이 회장 후보에 포함돼 있기 때문이다. 두 후보자는 노무현 정부 때 장관을 지냈다. 기업 경험 유무가 평가과정에 감안될 것이란 점을 들어 가능성이 높지 않다는 얘기도 나오지만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긴 어렵다.
4차 산업혁명을 선도해야 할 KT 회장이 정치적 외풍에 휘말리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만약 KT 내부 인사들이 주무부처와 정치권에 대한 로비의 필요성 때문에 힘 있는 인사를 원하고 있다면, 겉으로는 기업의 자율성을 주장하면서 물밑에서는 정부와 정치권 줄대기에만 힘을 썼던 과거의 행태와 다를 바 없다.
KT는 전화국 시절부터 한국통신을 거쳐 현재 42개 계열사, 재계 순위 12위의 거대 기업으로 성장하기까지 국민들이 낸 세금과 전화채권 지원 등이 발판이 됐다.
1997년 외환위기 후 민영화가 시작돼 2002년 5월 완전 민영화가 이뤄졌으며 국민들의 노후 재산을 관리하는 국민연금이 13.05%의 지분을 보유해 1대 주주다.
뿐만 아니라 수많은 소액주주들이 투자한 기업이기도 하다. KT를 단순한 통신재벌로 볼 수 없는 이유다. 무엇보다 통신기업은 공공성이 매우 강하다.
KT 회장 자리는 특정 정권의 전리품일 수 없으며 낙하산은 또 다른 낙하산을 부르기 마련이다. 이명박 정부 출범 이듬해인 2009년 KT 회장에 오른 이석채 전 회장 시절 ‘올래 KT’(외부에서 영입된 임직원)와 ‘원래 KT’(내부 KT 임직원) 간 분열이 극심했던 건 주지의 사실이다.
KT 차기 회장은 경영혁신을 이끌 비전이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의 앞에는 이사회의 내실화를 통한 내부경영 감시 등 지배구조를 개선해야 하는 과제가 놓여 있다. 벌써 노동이사제를 도입하고, 소비자 대표를 이사회 멤버로 포함시켜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문재인 정부는 집권 초기 ‘사이다 인사’를 통해 시민들을 감동시켰지만 이제 아련한 추억으로 남았다. KT 회장 자리는 현직 장관이 관심을 갖고 있다는 설이 돌았을 정도로 중요한 자리다.
역대 정권과는 다른 신선과 파격을 볼 수 있을까. 정치권력은 이제 KT를 놓아줘야 한다. 이번 회장 선출이 KT의 최고경영자(CEO) 리스크를 확실히 끊을 수 있는 시발점이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