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개 법정에 선 법관 인사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지난 5월29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김창길 기자 cut@kyunghyang.com
대법원장의 막강한 힘은 인사권에서 나온다. 한국은 법관 근무지를 2~4년마다 바꾼다. 다른 국가에서 찾아보기 힘든 주기의 전보 인사다. 고등법원 부장판사나 해외연수 같은 승진·선발성 인사도 대법원장이 총괄한다. 대법원장 권한을 위임받은 각 법원장들은 법관 근무평정을 한다. 판사마다 상중하 점수를 매긴다. 사회적으로 중요한 사건이 몰리는 형사재판이나 영장 전담을 누구에게 맡길지도 법원장이 결정한다.
문제는 어떤 기준으로 왜 그런 인사와 평가를 하는지 사법행정권자 외에는 아무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인사와 평가 대상인 판사 본인도 모른다. 일선 판사들이 윗선 눈치를 보는 관료화 현상도 바로 밀실인사 때문이다.
지난달 양승태 전 대법원장 재판
‘법관 인사 불이익’ 혐의 첫 심리
지난달 20일과 27일,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기소된 지 9개월 만에 처음으로 재판에서 ‘법관 인사 불이익’ 혐의에 관한 심리가 이뤄졌다. 양 전 대법원장은 대법원 정책에 반하는 판사들을 이른바 ‘물의 야기 법관’으로 분류하고 인사 불이익을 준 혐의를 받는다. 그동안 장막 뒤에 가려진 법관 인사 문제가 공개 법정에서 꺼내졌다. 인사 불이익의 효과는 특정 법관을 인사조치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법원행정처와 어긋나는 법관은 원치 않는 인사를 당할 수 있다는 신호를 법관사회 전체에 준다. 간접적으로 판결에 영향을 미치고, 공정한 재판을 받을 시민의 권리를 침해한다. 인사 불이익 혐의는 재판 개입과 거래만큼이나 법원의 부조리를 드러낸다.
■ 기준 없는 ‘물의 야기’ 법관
증인으로 출석한 노재호 판사
“징계·경고 받은 것 외에
언론 보도서 문제 됐던 분들
물의 야기 법관으로 보면 돼”
양 전 대법원장 재판에 증인으로 나온 노재호 판사는 ‘물의 야기 법관’을 이렇게 설명했다. “징계나 경고를 받았다고 윤리감사관실에서 알려주는 법관이 가장 대표적인 검토 대상입니다. 그 밖에 (법원장의) 근무평정과 인사관리 상황보고에 부정적인 특기사항이 적혀 있는 분들, 언론 보도나 국회 지적을 통해서 문제가 됐던 분들을 물의 야기 법관으로 검토했다고 보시면 됩니다.”
법정의 막말 판사나 음주운전·성추문 판사가 대표 사례라고 노 판사는 말했다. 노 판사는 2015~2016년 법원행정처 인사실에서 심의관으로 근무했다. 매년 2월 시행되는 정기인사 초안을 짜는 곳이다.
문제는 ‘정치적 중립’과 ‘집단행동 금지’ 의무를 위반했다는 이유로 물의 야기 법관으로 분류한 경우다. 법정에서 공개된 ‘물의 야기 법관 인사조치 검토-2015년 정기인사 정책결정’ 문건을 보면 송승용 판사는 “부적절한 게시글”로 물의를 야기했다고 기재돼 있다. 송 판사가 양창수 대법관의 후임 제청 과정에서 사법파동을 언급하는 글을 법원 내부통신망에 올린 게 물의 야기로 평가됐다. 송 판사는 이 때문에 창원지방법원 통영지원으로 보내졌다. 통영지원은 서울에서 가장 거리가 멀어 격오지 중의 격오지로 불린다.
2016·2017년엔 송 판사가 박상옥 대법관 후보자 거취를 두고 법원 내 설문조사를 하자는 글을 쓴 게 물의 야기로 꼽혔다. 박 대법관 후보자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수사검사로서 졸속 수사에 가담했다는 의혹을 받았다. 법원행정처 문건은 송 판사 글을 두고 “사회적으로 민감한 이슈에 대한 의견을 여과없이 표현, 좀 더 신중한 언행 필요”라고 적었다. 박노수 판사와 문수생 전 판사도 같은 이유로 물의 야기 법관에 포함됐다. 양 전 대법원장 등 피고인들은 대법관 제청 관련 글을 쓴 게 정치적 중립을 어기고 집단행동에 해당해 인사상 불이익을 줄 정당한 사유가 있었다고 주장한다. 법관의 ‘품위 유지 의무’ 위반이라고도 했다. 물의 야기 법관 문건들 표지의 대법원장 결재 칸에는 수기로 ‘梁(양)’이라고 쓰여 있다.
단순한 글 게시가 과연 정치적 중립과 집단행동 금지 의무 위반일까. 사법행정권자가 보기에 부적절할지라도 법관에게 인사상 불이익을 주는 것은 다른 문제다. 헌법 106조는 ‘법관은 징계처분에 의하지 않고는 정직·감봉, 기타 불리한 처분을 받지 않는다’고 규정한다. 법관 독립을 해치기 때문이다.
“증인이 대법관 제청에 대해 글을 올린 법관들을 선별해서 물의 야기 법관으로 분류한 이유는 무엇입니까?”(검사)
“통상적인 대법관 제청 과정에서 의견을 표명한 게 아니라 아마 당시가 대법관 후보 임명동의안을 국회 본회의에 상정할지 말지가 굉장히 첨예한 여야 간 정치적 쟁점이 된 때로 기억합니다. 그런 상황에서 특정한 대법관 후보자에 대해 찬성이든 반대든 의견을 공개적으로 표명한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노 판사)
“어떤 사람이 대법관이 되느냐는 사법부에 영향을 주는 주제인데 의견 표명 글 게시만으로도 물의 야기로 분류할 수 있는 것입니까?”(검사)
“세 분의 (법원장) 근무평정을 보면 다 그 사건에 대한 내용이 기재돼 있습니다. 근무평정에 부정적 기재사항이 있으면 실무자로서는 그 내용을 정리해서 보고하는 게 임무입니다.”(노 판사)
“세부적 근무평정 기준은 없어
법원장이 20년 이상 경험으로
체득해서 상중하 기준 나눈다”
노 판사는 법원장의 근무평정으로 책임을 돌렸다. 그러나 노 판사 말을 따르더라도 법원장의 근무평정은 별다른 기준이 없다. “세부적인 평정 기준은 없다. 상중하는 법원장이 20년 이상 법원 생활을 하면서 체득한 평균적인 판사를 기준으로 나눈다”는 게 노 판사 말이다. 검사가 “평정을 그 자체로 전적으로 신뢰하느냐”고 묻자 노 판사는 “그렇다”고 했다. 법원장의 근무평정이 공정하게 이뤄질 것이라는 믿음 속에서 별도의 검증 절차도 없이 물의 야기 법관에 포함시킨다는 뜻의 말이다. 법원장은 대법원장이 임명한다. 대법원장의 대법관 제청 후보에 법원장들이 들어간다.
■ 진보성향은 형사재판장 부적합?
법원행정처는 정기인사가 끝난 뒤 물의 야기 법관을 법원장들에게 알려줬다. 법정에서 공개된 ‘2016년 각급 법원 법관 참고사항-물의 야기, 평정불량 등’ 문건은 인사실이 정기인사 후 물의 야기 법관을 총정리해 법원행정처 차장에게 전달한 것이다. 차장이 법원장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문건 내용을 전달했을 것이라는 게 노 판사 증언이다. 노 판사는 과거의 부정적 평정이 또다시 활용되지는 않는다고 했다. 피고인들도 물의 야기 법관은 일회적으로 그해 인사에 반영했을 뿐, 목록으로 만들어 꾸준히 관리하는 ‘블랙리스트’는 아니라고 했다.
하지만 법원장 근무평정을 토대로 법원행정처가 물의 야기 법관을 추리고, 다시 그 내용을 법원장에게 알려주는 구조에서 한번 낙인찍힌 판사는 계속해서 부정적 평정을 받을 수 있다.
물의 야기 법관은 사무분담 결정에도 활용됐다. 사무분담이란 형사재판이나 영장 전담을 누구에게 맡길지 등을 말한다. 참고사항 문건 중 박노수 판사·문수생 전 판사 부분에는 이들이 박상옥 대법관 후보자 사퇴 촉구 글을 썼다는 내용과 함께 “형사재판 보임 시 공정성, 균형감각 차원에서 신중 검토”라는 내용이 적혔다. 노 판사는 “그분들의 선의와 달리 밖에서 볼 때는 마치 특정한 편을 드는 것처럼 오해될 수 있는 외관 형성의 측면이 있어서 사무분담에서 고려할 필요가 있지 않겠느냐는 취지에서 쓴 것”이라고 말했다.
‘수원 관내 형사재판 부적합 검토’ 문건은 한발 더 나아간다. ‘진보성향’을 형사재판장 배제 사유로 언급했다.
법원행정처 인사총괄심의관이었던 김연학 판사의 검찰 진술에 따르면, 이종석 당시 수원지방법원장(현 헌법재판관)이 형사재판에 부적합한 법관을 검토해줄 수 있느냐고 김 판사에게 문의했다. 김 판사는 인사실 심의관이던 방태경 판사에게 문건을 받아 이 법원장에게 내용을 설명해줬다고 했다.
문건에는 판사 이름과 평정 비율이 76%, 41%, 85% 식으로 적혀 있다. 누적 근무평정을 비율로 나타냈다. 그 옆에는 특이사항이 적혀 있다.
한 판사에게는 “검사로 약 10년 재직한 경력법관으로 불만이 많고 다소 독선적인 성품인데 근래에는 진보적 성향으로 치우치는 듯한 모습을 보이기도 함. 인권법연구회 운영위원. 양심적 병역거부 무죄”라고 쓴 뒤 ‘부적합’이라고 돼 있다. “최근 몇 년 사이에 사법행정에 대한 강한 불만을 표시하고 인권법연구회에 적극 참여함”이라고 적힌 판사는 ‘판단 보류’였다. “진보적 성향이 외부로 표시되어 편향성 비판 야기 수회”라고 기재된 판사도 있다. 정치적 중립과 집단행동 금지 의무를 위반했다는 이유로 법관에게 인사 불이익을 주면서, 한편으로는 정치적 성향 딱지를 붙여 사무분담 기준으로 삼은 것이다.
세월호특별법 제정을 주제로 언론에 기고글을 썼다가 물의 야기 법관이 된 문유석 판사에 대한 인사조치란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본인이 행정법원을 강력하게 원하고 있으므로 행정법원을 배제하는 것만으로도 불이익을 느낄 수 있음.” 인사조치에 법관의 행동을 억제하려는 의도가 있음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부정적 근무평정을 하고 물의 야기 법관으로 분류해 인사 불이익을 주면서도 대상 법관들에게 이를 공개하고 이의 제기를 받는 절차는 없었다. 불복할 기회라도 부여하는 징계 절차와 달리 법관 인사는 사법행정권자가 독점하고 수직적·밀행적으로 이뤄진다. 양 전 대법원장은 물의 야기 법관이 대부분 지방법원 부장판사 이하 법관이어서 인사안에 결재만 했을 뿐 구체적인 내용은 모른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