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인 속옷 브랜드 빅토리아 시크릿이 올해부터는 패션쇼를 열지 않겠다고 공식 발표했다. 뭐 그깟 패션쇼 안 하면 그만이지 왜 이게 뉴스거리인지 의아한 사람도 있겠지만, 한 번이라도 그 쇼를 보았다면 마음의 미동이 있을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화려한 패션쇼’라는 수식어는 괜히 달린 게 아니다. 길고 가느다란 여자 모델들은 마치 자신들이 천상의 가브리엘이라도 된 것처럼 화려한 날개와 깃털 장식을 한 란제리 차림으로 런웨이를 활보한다. 이 세상 화려함이 아니다. 심지어 이 무대는 1995년부터 매년 TV 생중계를 해왔고 평균 시청자가 무려 970만명이나 되었다. 문자 그대로 ‘에인절(angel)’이라 불리는 빅토리아 시크릿의 모델은 이 쇼를 통해 세계적인 톱 모델로 직행했다. 바로 지젤 번천, 나오미 캠벨, 타이라 뱅크스, 하이디 클룸, 미란다 커 등이다.

나이키의 달라진 마네킹 앞에서 포즈를 취한 플러스사이즈 모델 다이아나 시로카이(diana sirokai 인스타그램)
빅토리아 시크릿의 위상은 변하는 세상 속에서 달라지고 있다. 이들의 쇼는 여성의 성 상품화뿐 아니라 미에 대한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한 구시대적 발상이라며 비난을 받기 시작했다. 결국은 3분의 1로 떨어진 시청률이 시대의 흐름을 증명했고 영원할 것 같았던 에인절쇼도 마침표를 찍었다. 최고 마케팅 담당자의 인터뷰는 타오르는 비난 여론에 기름을 부었다. “트랜스젠더나 플러스 사이즈 모델은 빅토리아 시크릿이 보여주는 판타지의 표본이 아니다. 빅토리아 시크릿의 쇼는 42분짜리 오락이고, 전 세계를 대상으로 한 광고가 아니기 때문에 다양성을 확보할 계획이 없다”며 공식적으로 빅토리아 시크릿이 바라보는 미의 기준을 공표한 것이다. 물론 이후 마케팅 담당자는 퇴출되었고 뒤늦게 빅토리아 시크릿은 트랜스젠더와 플러스 사이즈 모델을 기용했으나 하락세는 이미 막을 수 없었다.

플러스사이즈 모델을 기용한 캘빈 클라인의 옥외 광고(fatouwurie 인스타그램)
지금 세계의 큰 화두는 두 가지, ‘지속 가능성’과 ‘다양성’이다. 환경문제의 대두는 지속 가능성에 대한 고민을 하게 하였고, 인간 존중에 대해 풍부해진 감정은 다름을 인정하고 다양성을 존중하는 문화를 굳건히 하고 있다. 패션 또한 그러한 흐름에서 벗어나 있지 않다. 패션이 지향하는 다양성의 존중은 다양한 방면에서 발현되며 인종, 성 정체성, 장애, 나이, 고정관념 등을 넘어 미의 기준을 새로 정립 중이다.
캘빈 클라인은 뉴욕 소호의 대형 옥외 광고판에 잘록하지 않은 허리와 두꺼운 팔뚝의 플러스 사이즈 흑인 여성 래퍼 치카 오라니카의 사진을 걸었다. 44사이즈의 마른 몸이 표본이던 미적 기준에 반기를 든 것이다. 보통의 평범한 몸을 말하는 ‘내추럴 사이즈 모델’도 활동 중이다. 나이키는 영국 런던 매장에 플러스 사이즈의 마네킹을 세웠다. 플러스 사이즈 모델의 기용뿐 아니라 매장의 마네킹 사이즈를 변화시킨 것이다. 이들은 최근 스포츠 브래지어 모델로 겨드랑이 털을 드러낸 나이지리아계 미국인 가수 아나스타샤 에누케를 모델로 기용해 또 한 번 이슈가 되었다. 매끈한 금발의 백인이어야 빅 브랜드의 모델이 되던 시대는 이제 끝났다. 팝스타 리한나의 란제리 브랜드인 ‘세비지 X 펜티’는 30AA부터 44DDD 사이즈(한국 사이즈로는 약 65A부터 90G)로 범위를 넓혀 제품을 생산한다. 또한 흑인부터 아랍계까지 다양한 피부색의 모델과 플러스 사이즈 모델을 쇼에 등장시켜 품절 사태를 불러왔다. 돌체&가바나는 여성복 사이즈를 UK22까지 넓혔다.(보통은 UK16까지 출시한다.) 지난가을 열린 뉴욕과 파리 패션위크엔 두 다리에 의족을 한 아홉 살 데이지 메이 드미트리가 모델로 나섰다. 장애인 아동이 모델이 된 건 처음이다. 트랜스젠더 모델의 기용은 더 이상 놀라운 소식도 아니다. 샤넬 뷰티의 첫 트랜스젠더 모델로 뽑힌 테디 퀸리번은 루이뷔통의 모델까지 거머쥐었고, 빨간 곱슬머리 톰보이 스타일의 여성 모델로 활동하던 내털리 웨슬링은 성전환 후 프라다 2020 S/S 남성복 컬렉션 무대에 섰다.
![[정소영의 아는 패션]44사이즈 ‘미적 기준’에 반기…다양성을 입은 패션](https://img.khan.co.kr/news/2019/12/06/l_2019120701000458300065633.jpg)
다양성의 인정은 인간에 대한 존중이자 존경이다. 인간성은 나와 다른 사람들을 배척하지 않고 경계 짓지 않을 때 더욱 긍정적인 방향으로 발전한다. 패션은 그런 역할의 선봉에 서야 할 의무가 있다. 인간의 기본권인 ‘의식주’ 중 ‘의’를 제일 먼저 언급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