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2년 FIFA 월드컵 개최국인 카타르가 월드컵 개최를 기념하며 도하 거리에 세운 상징물 앞을 차량들이 지나가고 있다. 도하|신화연합뉴스
걸프국가들이 최근 국제 스포츠 행사들을 연이어 개최하면서 ‘스포츠 메카’의 꿈을 현실화하고 있다. 아랍에미리트연합(UAE)·사우디아라비아·카타르 등은 석유 의존도를 낮추고 산업 다각화 차원에서 스포츠에 투자하고 있다. 세계 스포츠 팬들을 유인해 관광산업을 키우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스포츠를 우민화 정책의 도구로 삼으려 한다는 우려와 함께 인권탄압국의 이미지를 세탁하려 한다는 비판도 나온다.
UAE의 아부다비가 여행업계 권위있는 시상식인 ‘세계트래블어워드’에서 올해 ‘세계 최고의 스포츠 여행지’로 꼽혔다고 아랍에미리트통신(WAM)이 지난 9일(현지시간) 보도했다. 2017·2018 국제축구연맹(FIFA) 클럽 월드컵을 개최한데다 올해 아시아축구연맹(AFC) 아시안컵, 스페셜올림픽, UFC242도 아부다비에서 열렸다. 아부다비에선 매년 마라톤, 테니스, 철인3종경기 종목의 국제대회가 열린다. “아부다비가 스포츠 글로벌 수도로서 자리매김했다”고 WAM은 평가했다.
사우디·카타르도 스포츠에 대규모 ‘오일머니’를 들이고 있다. 사우디는 내년 1월 스페인 슈퍼컵을 비롯해 포뮬러E 자동차 경주대회, 유리퍼언투어 골프대회 등을 개최할 예정이다. 사우디는 스페인 슈퍼컵 3년을 유치하는데, 계약금만 연간 3500만~4000만유로다. 내년 2월엔 경마대회 ‘사우디컵’을 열면서 역대 최고 상금인 2000만달러를 내걸었다. 2022년 FIFA 월드컵 개최지인 카타르는 관련 인프라를 조성하는 데만 2000억달러를 쏟아부었다. 11일 카타르에선 올해 FIFA 클럽 월드컵이 개막했다.
스포츠 행사들은 걸프국들이 탈석유 시대로 가기 위해 내놓은 개방 정책과 맞닿아 있다. 지난 7일 사우디에선 복싱 팬들의 관심을 모으는 빅매치가 열렸다. 현존하는 헤비급 최고 선수로 꼽히는 앤서니 조슈아와 앤디 루이스 주니어의 대결에 3만여 관중이 몰렸다. 이날 경기에는 여성 관객의 입장도 허용됐다. 8일엔 사우디가 공공장소의 남녀 분리 출입구 규정을 폐지했는데, 외국인들 눈높이에 맞춰 개혁 조치가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 스포츠는 한편 정치적 긴장을 완화하고 통합을 촉진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올해 아라비아 걸프컵 축구전은 카타르에서 열렸는데, 2년 전 단교했던 사우디·UAE·바레인이 참여해 화해 분위기가 포착되기도 했다.

영국의 복싱 선수 앤서니 조슈아가 지난 8일(현지시간) 새벽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 외곽 디리야에서 열린 세계 헤비급 챔피언십 대회에서 앤디 루이스 주니어를 누르고 우승한 후 축하하고 있다. 리야드|AP연합뉴스

무함마드 빈살만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가 지난 7일(현지시간0 밤 리야드 외곽 디리야에서 열린 앤서니 조슈아와 앤디 루이스 주니어의 경기를 관람하고 있다. 리야드|AFP연합뉴스
이들 국가들은 스포츠 행사를 통해 관광산업을 키우는 한편 국제적 이미지를 높이려 하고 있다. 조슈아와 루이스 주니어의 경기는 ‘사막 언덕 위의 충돌’로 불리며 세계적 관심을 끌었다. 하지만 인권단체들은 걸프국들이 자국민로 하여금 정치·인권 등에 관심을 두지 않도록 스포츠를 ‘우민화’ 정책의 도구로 삼는다고 주장한다. 바레인은 9일 걸프컵에서 역사상 첫 승리를 거둔 것을 기념하면서 범죄 혐의로 수감 중인 미성년자 80명을 사회 봉사 등의 방식으로 대체하고 가석방할 것이라고 밝혔다. 바레인 인권단체의 아흐메드 알 와다이는 “80명의 미성년자가 석방되는 것은 긍정적인 발걸음이지만, 이들이 정치적 이유로 범죄자가 됐다는 문제 자체는 사라지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사우디는 지난해 10월 반체제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 살해 사건으로, 카타르는 월드컵 관련 건설현장에서 이주 노동자들의 대규모 인명 피해가 보고돼 국제사회의 비판을 받았다. 휴먼라이츠워치의 중동·북아프리카 지역 연구자인 애덤 쿠글은 CNN에 “걸프국가들이 주요한 스포츠 행사들을 개최함으로써 국제적 명성을 높이고 있지만, 불행히도 이 많은 스포츠 행사 뒤로 반체제 인사 탄압, 외국인 이주 노동자·여성 인권유린과 같은 문제는 그대로”라고 지적했다.
특히 ‘카슈끄지 사건’ 이후 사우디에서 열리는 스포츠 행사에 선수들이 참여해서는 안된다는 여론이 힘을 받으면서 스포츠 선수들의 고민도 깊어졌다. 세계 골프 랭킹 2위인 로리 맥길로이는 “도덕적인 이유”로 사우디에 가지 않는다고 밝혔다. ‘골프 황제’ 타이거 우즈도 사우디 대회 초청을 거절, 인권 문제를 의식한 것이라는 분석이 나왔다. 다만 우즈는 “정치적 논란이 있다는 점을 알고 있지만 골프가 그런 부분에 도움이 될 수 있다”면서 사우디 대회에 출전하는 동료 선수들을 옹호했다. 경기에 앞서 사우디 인권 문제와 관련한 질문을 받은 복싱 선수 조슈아는 “사우디가 정치적으로 좋은 일을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답했다가 인권단체들의 비판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