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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한 시민’이 되자

입력 2019.12.11 20:52

수정 2019.12.11 2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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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처럼 사회가 꽉 막혀 한발도 나아가지 못한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던 것 같다. 한 장 남은 달력. 차분하게 한 해를 정리할 시점인데, 여기저기가 파헤쳐 놓은 공사판이다. 답답함의 근원은 최근 뉴스에서 불쑥불쑥 마주치는 ‘불신’이라는 단어와 관련이 깊지 싶다.

[경향의 눈]‘독한 시민’이 되자

‘하명수사 의혹’과 관련해 검찰 수사를 믿지 못하겠다는 청와대와 여당의 태도가 연일 표출되고 있다. 지난달 19일 ‘국민과의 대화’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윤석열 검찰총장을 신뢰한다고 말한 지 3주가 지났을 뿐이다. ‘신뢰’의 무게란 얼마쯤일지 생각하게 된다. 하명수사 의혹을 둘러싼 검찰과 경찰의 갈등은 ‘불신의 끝판왕’이다. 사망한 수사관의 휴대전화 쟁탈전이 벌어지고, 서로를 못 믿겠다며 기초적인 조사에도 응하지 않는다.

고교생 자녀를 둔 부모 입장에선 지난달 말 교육부의 대입 개편안 발표가 당황스러웠다. 지난해 온 사회의 숙의 끝 결정된 기본틀을 설마 흔들지 않겠지 생각했다. 이를 곧이곧대로 믿었는데, 1년도 안돼 뚜렷한 근거도, 명분도 없이 뒤집을 수 있는 건가. 배신감이 들었다. ‘유치원 3법’ ‘어린이생명안전법’ 등 민생입법에 대해선 아예 말문이 막힌다. 들끓는 여론 속에 만들어져 당장이라도 시민 삶을 바꿀 줄 알았던 법안들이 국회 파행 속에 흥정과 거래의 대상이 되는 과정을 ‘날것 그대로’ 지켜봐야 했다. 그래놓고 시한 넘긴 예산안은 속기록, 브리핑도 없이 국회의원들이 알아서 잘 심사했으니 믿어달라고 한다.

도대체 무엇을 믿어야 하나. 믿을 사람이 없고, 입법·사법·행정부 모두를, 이 나라의 제도와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는지를 믿을 수 없다. 이러니 새해엔 달라질 것이라는 믿음도 없다. 대체 우리 사회는 왜 이 모양인가. 신뢰의 붕괴, 신뢰 실종이라고 쓰려다 멈칫했다. 신뢰라는 것이 애초 있기나 했을까.

생각해 보면 법과 제도는 교과서에서나 지키라고 배운 것이었다. 실생활에선 그대로 지키면 나만 손해본다는 생각이 해를 거듭할수록 더욱 뼈저린 ‘삶의 교훈’이다. 불법주차, 세금탈루, 위장전입, 부동산 다운계약서 등 불법과 탈법, 합법의 칸막이가 얼마나 낮은가. 반칙을 위한 촌지와 뇌물들은 또 얼마나 많았나. 정작 수많은 위법사안에서 피라미만 걸리고, ‘큰 도둑’들은 활개치는 장면들을 수없이 목격하며 불신은 커져 갔다. 며칠 전만 해도 1년 넘게 2억원 이상 국세 고액·상습체납자들 체납액이 5조4000억여원에 이르고, 이들 상당수가 재산을 숨기고 호화 해외여행까지 한다는 기사가 나오지 않았나.

<다시 태어난다면 한국에서 살겠습니까>의 저자 이재열 서울대 교수(사회학)는 “불신은 과거의 경험, 특히 제도나 시스템을 믿을 수 없었다는 경험에서 온다”고 했다. 우리의 저신뢰는 심각한 상황이다. 영국의 유명한 싱크 탱크인 ‘레가툼연구소’가 최근 발표한 ‘2019 세계번영지수’에서 한국의 종합순위는 상위권(29위)이었지만, 사회자본(공적·사적 관계, 제도에 대한 신뢰, 규범, 참여 등)은 167개국 중 142위로 바닥권이었다. 튀니지, 우간다, 벨라루스 등과 비슷하고, 카메룬, 베네수엘라보다 낮다.

어디에서 희망을 찾아야 할까. 신뢰 상위국가들처럼 감히 반칙을 생각할 수 없는 엄격한 규칙과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 이재열 교수는 미국의 정치학자 셰보르스키의 말을 인용해 ‘민주주의는 불신을 제도화한 것’이라고 말한다. 기본적으로 인간의 본성을 믿을 수 없기 때문에 서로 견제하도록 시스템으로 권력을 분산하는 과정이라는 설명이다. 그런데 권력분산의 룰 대부분이 국회에서 결정되고, 그 열쇠를 국회의원들이 쥐고 있으니 답답한 노릇이다.

20대 마지막 국회에선 어린아이들을 잃은 부모의 눈물을 계속 봐야 했다. 애원하고 무릎 꿇고 빌며 아이 이름을 건 어린이안전법안들의 통과를 바라던 눈물이, 자유한국당의 필리버스터 결정으로 법안 무산 위기에 처한 직후엔 “우리 아이들을 이용하지 말라” “이게 대한민국 정치 현실이라니 이 나라가 진짜 싫다”는 절규로 변했다. 민식이·하준이 법이 그제 겨우 통과했을 뿐, 부모들은 또 눈물을 삼킨다. 자녀들을 가슴에 묻은 세월호 부모들은 진실만이라도 밝혀달라 애원했지만 국회가 두 번 바뀌도록 진척된 건 거의 없다.

눈물을 걷고 독해져야 한다. 각종 약속들을 독하게, 끈질기게 지켜보고, 약속을 어겼을 땐 심하다 싶을 정도로 독하게 처벌하고 심판해야 한다. 불신이 갉아먹은 사회자본만큼 가중처벌도 해야 한다. 그래야 신뢰의 싹을 틔울 수 있다. 선거의 해. 여야를 막론하고 더 이상 악어의 눈물, 참회와 반성에 속으면 안된다. 새해엔 독한 시민이 되자. 고비마다 대한민국 사회를 이만큼 굴려온 99%는 약하지만 강한, ‘시민들의 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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