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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레 민주화 30년, 되살아난 ‘독재 망령’…그리고 다시 쓰는 헌법

입력 2019.12.24 15:43

수정 2019.12.24 2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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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레 반정부 시위대가 지난 21일(현지시간) 수도 산티아고에서 열린 시위 도중 경찰이 쏜 물대포를 맞고 있다. 앞서 지난 20일 시위에서 경찰의 최루가스 발사차량이 시위대원을 향해 돌진해 신체 일부를 친 다음 다시 그를 향해 물대포를 쏘는 장면이 담긴 동영상이 퍼져 공분을 샀다.  산티아고|로이터연합뉴스

칠레 반정부 시위대가 지난 21일(현지시간) 수도 산티아고에서 열린 시위 도중 경찰이 쏜 물대포를 맞고 있다. 앞서 지난 20일 시위에서 경찰의 최루가스 발사차량이 시위대원을 향해 돌진해 신체 일부를 친 다음 다시 그를 향해 물대포를 쏘는 장면이 담긴 동영상이 퍼져 공분을 샀다.  산티아고|로이터연합뉴스

칠레 반정부 시위에 참여한 루이스 마누엘 마르도네스(57)는 얼마전 시위 현장에서 경찰이 14살 소녀를 때리려는 걸 막으려다가 체포됐다. 경찰이 휘두르는 곤봉에 맞아 팔이 부러졌고, 발가벗겨진 채 한동안 땅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경찰은 그에게 “다음 시위 때 또 붙잡히면 영원히 가둬두겠다”고 겁을 줬다.

마누엘 마르도네스는 30여년 전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독재정권 때에도 붙잡혀가 고문을 당했던 피해자다. 군사독재정권이 무너지고 민주화가 된 지 30년. 칠레에서는 최근 반정부 시위를 진압하는 경찰의 폭력과 인권침해가 극에 달하면서 독재의 망령이 되살아나고 있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칠레 국가인권연구소 세르히오 미코 소장은 지난 23일(현지시간) 연례 보고서를 발표하면서 “1989년 이후 최악의 인권침해를 목격하고 있다”고 말했다고 일간 라테르세라 등 칠레 언론이 보도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10월17일부터 11월30일까지 시위 현장에서 경찰에 의해 살인, 고문, 성폭력 등 수백건의 잔혹행위가 벌어졌다. 미코 소장은 “이것이 민주주의 국가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인가”라면서 정부에 재발방지 대책 및 피해자에 대한 보상 조치를 취하라고 권고했다.

미첼 바첼레트 전 칠레 대통령이 이끄는 유엔 인권최고대표부의 조사에 따르면 최근까지 반정부 시위에서 최소 26명이 숨지고, 3000여명이 부상했다. 부상자 중 350여명은 경찰이 쏜 최루탄, 고무탄 등에 맞아 눈을 크게 다쳤다. 이중 100명 가까이는 시력을 잃을 수도 있다. 칠레 의과대학의 인권부 대표인 엔리케 모랄레스는 “의료·인권 측면에서 재앙”이라고 표현했다. 영국 기반 비영리 시사잡지인 ‘뉴 인터내셔널리스트’는 23일 “피노체트는 오래 전에 사라졌지만, 그때와 비슷한 경찰 폭력이 칠레로 돌아왔다”고 했다.

1973년 쿠데타로 사회주의자인 살바도르 아옌데 대통령을 몰아내고 17년간 집권한 피노체트 군부는 민주화 요구 시민들을 상대로 감금, 고문, 살인 등의 범죄를 저질렀다. 1990년 대선을 치르면서 형식적 민주화를 이뤄낸 후에도 피노체트 생전에 단죄하지 못했다. 또한 독재시절 구축한 신자유주의 경제 체제가 부작용을 낳는데도 손놓고 있었다.

피노체트 정권은 당시 미국에서 유학하며 대표적 시장주의자인 밀턴 프리드먼에게 배운 ‘시카고 보이즈’들을 경제 관료로 대거 기용했다. 1997년까지도 높은 경제성장률을 보이자 칠레는 ‘신자유주의 모델국’으로 평가받았으며 프리드먼은 “칠레의 기적”이라고 했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빈곤은 늘고 있었다”고 리차드 데이비스 전 이코노미스트 편집장은 말했다.

이런 배경 때문에 칠레는 과거사 청산을 제대로 이뤄내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청산 대상 1호는 1980년 군부 정권 때 제정된 헌법이다. 시위대는 헌법이 연금·의료·교육 분야의 심각한 불평등의 근간이라면서 개헌을 요구해왔다.

23일(현지시간) 칠레 수도 산티아고 대통령궁에서 새 헌법 제정을 위한 국민투표 시행안에 서망하는 세바스티안 피녜라 대통령. 산티아고|AFP연합뉴스

23일(현지시간) 칠레 수도 산티아고 대통령궁에서 새 헌법 제정을 위한 국민투표 시행안에 서망하는 세바스티안 피녜라 대통령. 산티아고|AFP연합뉴스

세바스티안 피녜라 대통령은 이날 새 헌법 제정을 위한 국민투표 시행안을 승인하면서 “새 헌법이 폭력과 분열에서 벗어나게 하는 역할을 하길 바란다”고 했다. 칠레는 내년 4월26일 국민투표를 진행한다. 국민투표는 국민이 새 헌법 제정을 원하는지, 원한다면 누가 법안 작성의 주체가 돼야 하는지를 묻는 두 가지 문항으로 이뤄진다.

피녜라 대통령이 앞서 개헌에 반대해왔던 점, 경찰의 인권침해 문제 등으로 현 정부에 대한 불신이 크다. 시위대가 피녜라 대통령의 즉각 퇴진을 요구하고 있는 만큼 개헌 국민투표와 관계 없이 당분간 시위는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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