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희망을 품고 새해를 시작하지만 먹고살기 고달픈 민초들은 올 한 해 어떻게 버틸지 걱정이 앞선다. 차가운 경제민심을 위정자들도 모를 리 없을 게다. 한 회사원은 “2020년에는 무급휴직을 실시하는 기업들을 흔하게 볼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리스크 관리가 올해 산업계의 화두가 될 것이란 전망도 나왔다. 나라 안팎으로 11월 미국 대선, 4월 21대 총선이란 굵직한 정치 일정이 기다리고 있다. 총선 결과에 따라서는 문재인 정부의 레임덕(lame duck·권력누수)이 확연해질 수도 있어 올 한 해 우리 경제는 그야말로 예측불허다.
한국 경제를 두고 ‘회색 코뿔소’ 상황에 있다는 진단을 많이 한다. 회색 코뿔소는 위기관리 전문가인 미셸 부커가 2013년 다보스포럼에서 언급한 뒤 널리 알려졌다. 아프리카 너른 풀밭에 있는 회색 코뿔소처럼 멀리서 잘 보이고, 움직일 때 진동도 커 달려오면 충분히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못함을 뜻한다. 경제적으로 보면 개연성이 높고, 큰 충격을 가할 위험이 다가오고 있지만 반응과 대처가 늦어지면서 난국에 처하는 상황을 의미한다. 예컨대 저출산·고령화, 성장동력 부재에 따른 저성장 고착화, 갈수록 확대되는 빈부격차 등 한국 경제의 구조적 위험은 누구나 알고 있다. 하지만 주요 경제주체들은 저마다의 이해관계만 앞세울 뿐 희생과 타협을 통한 종합처방전에는 소극적이다. 위험신호는 강하지만 반응은 더딘 형국이다.
한국 경제가 어려움에 처한 책임을 정부에만 돌리는 건 설득력이 부족하다. 역대 정부를 거치며 장기간에 걸쳐 누적된 것이라고 보는 게 타당하다. 경제적 위험요소가 확대되기 전에 장기적 관점에서 시간과 재원을 투자하며 대비해야 했지만 그러질 못했다. 단기처방에만 급급했기 때문이다.
오는 5월이면 문재인 대통령이 집권 3년을 맞는다. 레임덕이 본격적으로 회자되어도 이상할 게 없는 시점이다. 하지만 마이티덕(mighty duck·레임덕의 반대말)으로 반전을 이뤄낼 시간은 남아 있다. 레임덕은 흔히 권력층 내부의 갈등과 투쟁, 경제적 불안 등에 기인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국민들은 정권의 임기 후반으로 갈수록 경제적 관점에서 정권을 평가하는 속성이 강하다. 안정된 경제야말로 레임덕 방지의 필수조건인 셈이다. 레임덕이란 말 자체도 원래 경제 분야에서 처음 사용됐다. 채무 불이행 상태의 증권거래인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설사 경제가 기대만큼 풀리지 않아도 제대로 방향을 잡고 노력한다는 공감대가 확산돼 있으면 괜찮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것이 신뢰다. 기다리면 소득주도성장정책 효과가 나타날 것이라든지, 부동산 정책은 자신있다는 식의 말은 오히려 신뢰를 갉아먹는다.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은 레임덕에 시달리지 않은 대표적 지도자다. 원칙을 고수하면서도 소통에 뛰어났기 때문이다. 그는 “소수만 성공하는 경제를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노력하는 모든 사람의 소득 증대와 기회 확대를 창출하는 경제를 택할 것인가”라며 자신의 어젠다를 고수했다. 그러면서도 지지자와 반대편을 가르는 방식에서 벗어나 너와 내가 아닌 우리라는 통합의 메시지를 설파했다.
정부·여당은 경제정책의 선의에만 기대 소통에 소홀했던 건 아닌지, 메시지 전달과 관리방식에 오류는 없었는지 점검해야 한다.
집권층은 스티브 잡스의 명언 중 하나인 ‘늘 갈망하고 우직하게 나아가라’(Stay hungry, stay foolish)는 말을 새기는 것도 괜찮을 듯싶다. 총선 표를 잡기 위한 어설픈 정책 유턴은 금물이다.
보수의 중심인 자유한국당에 필요한 건 상식에 기반한 정치와 정책이다. 한국당은 박근혜 정부 시절 미뤄둔 경제민주화를 외면한 채 문재인 정부 내내 남의 농사 망하기만 기대하는 정치세력 아니냐는 의구심을 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흔히 경제는 보수라고 하지만 지금 한국당에서는 그런 모습을 찾기 어렵다. 유권자들에게 한국당이 경제문제를 더 잘 해결할 수 있는 정당인지 묻는다면 몇%나 찬성할까.
재벌의 경제력 집중을 완화하고, 분배에 신경을 쓰는 정책이 특정 정권만의 과제일 수는 없다.
한국당은 선거 때만 되면 경제민주화를 외치다가 선거가 지나면 모른 척하는 역사를 되풀이해왔다. 철 지난 재벌의 낙수효과에 기댄 성장주의로 회귀하려는 유혹을 이겨내야 한다. 그것이 상식의 정치이며 복지 확장과 분배에 관심을 가진 대안세력으로 거듭나는 길이다.
김동연 전 부총리는 정치세력 간 대립과 그로 인한 사회적 갈등을 한국 경제의 회색 코뿔소로 지목한 바 있다. 원칙에 충실하고 초심을 견지하는 정부·여당, 건전한 상식을 받아들일 줄 아는 야당, 정파의 이익보다 다음 세대를 생각하는 ‘정치가’의 등장이 올 한 해 절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