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적

여아는 분홍, 남아는 파랑?

송현숙 논설위원

“분홍색 옷을 준비하세요”, “파란색 옷을 준비하세요”. 아기의 성별을 암시하는 이 말은 산부인과에서 흔히 들을 수 있다. 의심 없이 ‘분홍색은 딸, 파란색은 아들’로 받아들여진다.

100여년 전만 해도 반대였다. 분홍이 남성의 색이었다. 색의 인문학, 역사적 배경을 설명하는 책 <컬러인문학>에는 색에 얽힌 다양한 일화들이 나온다. 1897년 <뉴욕 타임스>는 ‘아기의 첫번째 옷’이라는 기사에서 “분홍은 대개 남자아이의 색으로, 파랑은 여자아이의 색으로 간주되지만 어머니들은 그 문제에서 자신의 취향을 따르면 된다”고 충고했다. 1918년 영국의 <브리티시 레이디즈 홈 저널>은 “널리 받아들여지는 통념에 따르면 남자아이에게는 분홍이, 여자아이에게는 파랑이 좋다. 분홍은 좀 더 분명하고 강해 보이는 색으로 남자아이에게 더 잘 어울리지만 파랑은 좀 더 섬세하고 얌전해 보여 여자아이한테 더 잘 어울리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분홍을 남성적으로 본 큰 이유는 빨간 피와의 연관성 때문이라고 한다. 최고의 복서로 평가받는 슈거 레이 로빈슨이 1946년 첫번째 세계 타이틀을 거머쥐고 자축의 의미로 처음 구입한 캐딜락 색깔이 분홍이었는데, 이 취향도 놀랄 만한 것이 아니었을 정도다. 반면 부유한 로마 남성들은 여성적인 색이라는 이유로 파랑을 경시했다고 한다.

이처럼 색의 이미지는 시대에 따라 변한다. ‘분홍은 여성, 파랑은 남성’이라는 현재의 이미지는 마케팅과 사회화의 산물일 가능성이 크다. 1950~1960년대부터 ‘시장’에서 ‘여성과 분홍’을 적극적으로 연결시켜 광고했고, 제품과 연관된 이미지도 무의식중에 강화된 셈이다.

2일 ‘정치하는 엄마들’이 일부 영·유아용 옷과 문구류에 여아용은 분홍색, 남아용은 파란색이 정해져 있어 아이들이 색을 고를 권리를 침해하고 있다며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서를 냈다. 이 단체는 성 역할 고정관념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는 ‘핑크 노 모어’ 캠페인도 펼치고 있다. 파랑, 분홍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여자답게’ ‘남자답게’가 문제다. 아이들의 가능성을 반쪽으로 가둘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 분홍, 파랑의 모든 좋은 함의를 다 갖춘, 더 넓고 큰 아이들이 ‘나답게’ 자라는 2020년대가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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