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지난 9일(현지시간) 키예프 국제공항에서 이란군의 미사일 오인 격추로 추락한 우크라이나항공 여객기 희생자들의 영정 앞에 꽃을 놓으며 추모하고 있다. 키예프|EPA연합뉴스
우크라이나 키예프의 가구 판매원인 이호르 코발렌코(34)는 지난 11일(현지시간) 우크라이나항공 여객기가 이란 혁명수비대의 미사일 오인 격추로 추락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이란에 대한 반감이 차올랐다고 했다. 그러다 이란 시민들이 정부의 잘못을 규탄하는 집회를 여는 것을 보고는 이란인들에 공감하게 됐다고 했다. 코발렌코는 14일 알자지라에 “이란인들이 우리를 대신해 항의하는 것을 본 후, 자신들의 지배력에 취해있는 미국인들보다는 이란인들을 훨씬 더 가깝게 느꼈다”고 말했다. 이어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 종속돼서는 안된다”고 했다.
앞서 3일 미국이 가셈 솔레이마니 전 이란 혁명수비대 쿠드스군 사령관을 살해하고, 8일 이란이 이라크 내 미군기지에 미사일을 공격하면서 양국 갈등이 삼화한 상황에서 여객기 추락 사고로 우크라이나인 11명이 목숨을 잃었다.
미국·이란 분쟁 속 줄타기
우크라이나 안에선 젤렌스키 대통령의 대응을 두고 여론이 갈라졌다. 코미디언 출신으로 지난해 4월 대선에서 승리해 대통령에 취임한 ‘정치 신인’ 젤렌스키는 분리주의 세력을 지지하는 불편한 이웃 러시아, 자국과 연관된 스캔들로 탄핵 정국에 빠진 미국의 지도자들을 상대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이란 갈등에 휘말리지 않아야 하는 또 다른 숙제를 안게 된 것이다.
우크라이나는 이란이 11일 미사일 오인 격추를 인정하기 전부터 사고 원인을 알고 있었음에도 공개하지 않았다고 워싱턴포스트가 13일 보도했다. 우크라이나 조사팀이 현지에서 구체적인 증거를 확보하려면 이란의 협조가 필수적이라는 판단에 따라 조심스러운 외교적 노선을 선택하고, 이란에 대한 비판을 자제했다고 WP는 전했다. 사고 직후 미국과 캐나다, 영국은 해당 여객기가 이란 미사일에 격추됐다고 밝혔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이들 국가에 정보 공유를 요청하면서도 아무런 입장 발표를 내놓지 않았다.
미국 외교·안보 연구소 윌슨 센터의 니나 얀코비츠 연구원은 젤렌스키 대통령에 대해 WP에 “정치 초보로서 국익 보호를 위해 반대 세력에 어떻게 다가가야 할지에 대한 예민한 감각이 있는 것 같다”고 평했다. 키예프의 정치분석가 미하일 포그레빈스키는 알자지라에 “서방은 젤렌스키가 즉시 이란을 압박하기를 원했지만 그는 이틀을 버텼다”고 말했다. 반면 또다른 분석가인 알렉세이 쿠쉬는 “젤렌스키는 먼저 침묵했고 결과적으로 우크라이나 여객기의 비극은 지정학적 게임에 사용되고 있다”고 말했다.
러시아·미국의 스트롱맨 상대하기
사실 여객기 추락 사고는 우크라이나에 ‘아픈 기억’을 상기시킨다. 2014년 7월17일 네덜란드를 출발해 말레이시아로 가던 말레이시아항공 여객기가 추락해 298명이 사망했다. 당시 추락 여객기는 우크라이나 정부군과 친러시아 분리주의 반군 간 교전 지역 상공을 지나고 있었다. 여객기가 반군에 제공된 러시아 미사일에 피격됐다는 조사 결과도 나왔지만, 러시아는 끝까지 부인했다.
페트로 포로셴코 전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지난 10일 트위터에 “이란이 러시아와 동맹을 맺고 있는 만큼 러시아에도 영향을 미치는 미국·이란 대결에서 우크라이나가 노리개가 돼서는 안된다”고 썼다. 그는 이어 “우리가 잃은 사람들의 기억을 기념하고, 정의를 회복하고, 우크라이나가 지정학적 갈등에 끌려다니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했다.
우크라이나는 포로셴코 정부에서 ‘유럽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가 됐다. 젤렌스키는 지난해 12월 말 러시아와 천연가스 공급·수송 계약을 연기하는 등 경제를 위해 러시아와 아슬아슬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2014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의 크림반도를 강제 병합한 후로 돈바스 지역에서 정부군과 분리주의 반군의 교전이 시작됐다. 분쟁은 5년 넘게 이어지다 1만3000명 이상이 숨졌다. 젤렌스키 정권이 들어선 후 지난달 휴전에 들어갔다. 러시아에 반감이 있는 우크라이나 국민들은, 미·이란 갈등에서 이란을 편드는 러시아를 보며 복잡한 감정을 느낀다.
최근 우크라이나는 미국의 정쟁 싸움터로 변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정적인 조 바이든이 자신의 아들이 이사로 재임한 우크라이나 가스회사 부리스마를 위해 영향력을 발휘했다는 비리 혐의를 제기했으나, 증거는 나오지 않았다.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해 7월 젤렌스키 대통령과 통화하면서 바이든 부자에 대한 수사를 종용한 사실이 드러나 최근 탄핵 정국으로 이어졌다.
트럼프는 어쩌다 탄핵 조사를 받게 됐나…‘우크라이나 스캔들’ 총정리
우크라이나의 한 참전 용사는 알자지라에 “젤렌스키의 여러 정책에 반대하지만, 의사 결정에 더 자립해야 한다고 믿는다. 미국인들이 이미 우리를 실망시켰기 때문에 우리는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