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는 자신을 위한 거예요…페기씨, 행복을 선택하세요”

봉준호 감독이 아카데미 감독상 수상소감에서 경의를 표했던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의 넷플릭스 영화 <아이리시맨>. 극중 프랭크 시런(로버트 드 니로·작은 사진)은 충실한 마피아의 일원이 되려다 그만 딸 페기(안나 파킨)에게 영원히 두려운 존재로 남는다.
평범한 트럭운전사에서 마피아의 충실한 살인 청부업자가 된 프랭크 시런은 어느 날 딸 페기가 동네 슈퍼마켓 주인에게 혼쭐이 났다는 얘기를 전해 듣고는 득달같이 슈퍼마켓으로 달려가 주인을 흠씬 두들겨 팬다. 가족을 보호하겠다는 취지였겠지만 이는 역효과를 내고, 페기는 영영 아버지에게 곁을 내주지 않는다.
페기 = 아버지와의 관계가 힘들어서 왔습니다. 아주 오래전부터 사이가 좋지 않았어요. 어릴 적엔 아버지가 무서웠고, 좀 커서는 제가 아버지를 철저히 무시했어요. 독립하고 나서는 아예 만나지 않았고요. 직장으로 저를 보러 오셔도 피해버렸죠. 그런데 이렇게 사는 것이 옳은가 싶네요. 그래도 가족인데… 용서? 아니면 화해? 이런 것이 꼭 필요할까요?
김 박사 = 두 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나요?
페기 = 저희 아버지는 좀 남달라요. 자식들에게 폭력을 휘두르지는 않았지만, 어릴 적부터 아버지가 너무 무서웠어요. 한번은 제가 슈퍼마켓에 갔다가 무슨 실수를 저질러서 주인에게 야단맞은 일이 있었어요. 별 생각 없이 집에서 그 얘기를 했는데 아버지가 엄청 화를 냈어요. 급기야 저를 앞세우고 슈퍼마켓에 가서는 주인을 사정없이 때렸습니다. ‘저러다 저 아저씨가 죽으면 어떡하나’ 공포를 느꼈어요. 그 후부터였던 거 같아요. 아버지가 공포의 대상이 된 건.
TV 속 폭력도 극도로 불안해요
“아버지가 이웃을 때린 그 사건이 잊히지 않고 트라우마가 됐군요”
김 박사 = 그런 큰일이 있었군요. 그런데 아버지는 페기씨를 사랑하진 않았나요?
페기 = 사랑하셨어요, 너무 사랑하셨죠. 그런데 무서웠어요. 전 늘 아버지가 못마땅했어요. 옳지 않은 일을 하는 분이었으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에게 함부로 한다고 야단도 많이 맞았어요. 제 성격이 나빠서 그런 건 아니에요. 다만, 아버지에게 친절할 수 없었을 뿐이죠. 어릴 적 슈퍼 아저씨 생각만 하면, 지금도 덜덜 떨릴 정도예요.
김 박사 = 아직도 어릴 적 공포를 잊지 못할 정도라니 트라우마가 된 듯합니다. 트라우마는 감당하기 힘든 감정적 고통을 동반하는 사건에 생기죠. 페기씨와 같이 폭력에 노출되었다든지, 또는 극심한 가난이나 질병같이 어린 나이에 스스로의 노력으로 피할 수 없는 상태를 겪는다면, 트라우마로 남기 쉽습니다.
페기 = 그래서인지, TV나 영화에서 폭력적인 장면을 보면 극도로 불안해져요. 두려움과 공포가 엄습하죠. 남들은 제 속도 모르고 ‘뭐 그 정도 가지고 그러느냐’며 의아해해요. 아마 말해도 이해 못할 거예요. 전 마치 TV 속 잔인한 장면의 희생자가 된 듯하거든요. 가해자에 대한 미움과 분노가 상상 이상으로 솟구칩니다.
김 박사 = 트라우마 때문에 생기는 병이 있습니다. PTSD, 즉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Post-traumatic stress disorder)인데요. 전에 겪었던 것과 비슷한 상황에 부딪히면 두려움에 피하게 되죠. 자꾸 그때의 기억이 되살아나거나 악몽을 꾸기도 하고요.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고, 나와 상관없더라도 비슷한 상황에 맞닥뜨리면 덜덜 떨리기도 합니다. 그 원인 중 하나가 기억의 문제인데요.
페기 = 기억이 원인일 수 있다고요? 어릴 적 슈퍼 아저씨 사건이 지금의 민감성과 관계 있다는 뜻인가요?
김 박사 = 네, 맞습니다. 우리 기억은 뇌에 저장될 때 정리 과정을 거칩니다. 쓸데없는 기억은 기억창고의 안쪽 속에 놓이게 되지요. 당장 필요가 없으니까요. 그리고 집 현관문 비밀번호와 같이 자주 필요한 기억은 쉽게 꺼내볼 수 있게 기억창고의 앞쪽 가까이에 놓이게 됩니다. 그런데 해결하지 못한 힘든 감정이 얽혀 있는 기억은 아예 기억창고에 들어가지 못해요. 문밖에서 서성대다가 유사한 상황이 발생하면 그때의 고통을 다시 소환하죠.
페기 = 그래서 제가 유난히도 폭력적이거나 그와 유사한 상황에 예민해지는군요. 이런 마음의 상태가 해결되지 않고 오래 지속되면 성격까지 변할 수 있나요?
김 박사 = 불행히도 그렇답니다. 페기씨 성격은 어떤가요?
페기 = 저요? 그냥 무난해요. 아니, 지나치게 무난하죠. 인간관계를 하면서 문제가 생길까 봐 많이 참고 피하는 편이에요. 다른 사람의 부탁도 잘 거절하지 못하고요. 가능하면 ‘좋은 게 좋은 거다’주의예요.
김 박사 = 거절을 못한다…. 다른 사람들은 페기씨를 마음 넓은 사람이라고 하겠군요. 어떤 부탁을 해도 다 들어주니까요.
페기 = 네. 솔직히 말하면, ‘동네북’인 셈이지요. 회사에서 무슨 일이 생기거나 자기들이 하기 싫은 일이 생기면 제게 던져요. 바로 거절하고 욕이라도 해주고 싶지만, 그렇게 되면 저는 더 외톨이가 되겠죠. 차라리 동네북이 나아요, 왕따보다는요. 아마 제 자존감이 엉망이라 그럴 거예요. 혹시 이것도 아버지와의 문제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나요?
김 박사 = 그렇다고 할 수 있어요. 직접 폭력을 당하지 않았더라도, 그런 장면에 자꾸 노출되면 커가면서 성격적으로 주눅 들기 쉽죠. 위험한 상황에서도 스스로를 방어할 수 없고,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진면목을 표현할 수도 없어요. 물론 반대인 경우도 있어요. 아주 공격적인 사람이 되죠. 그런데 페기씨, 힘들 때 마음 터놓고 이야기할 사람은 있나요?
페기 = 엄마나 자매들이 있지만, 그들에게 못할 이야기도 있잖아요. 어릴 적에 몇몇 친구들에게 마음속 이야기를 한 적이 있는데, 속이 편치 않았어요. 오히려 괜한 얘기를 했다는 후회만 남더라고요.
‘동네북’ 성격도 연관이 있나요
“폭력적인 장면에 계속 노출되면 사람들 앞에서 주눅들기 쉽죠”
김 박사 = 사랑하는 사람은요?
페기 = 글쎄요. 있었겠죠. 잘 모르겠어요. 제가 꼭 어린아이 같죠? 누군가 나를 사랑하면, 오히려 부담이 돼요. 갑자기 등을 돌려 버릴까봐서요. 그래서 가까이 오면 멀리 도망치죠. 그러다가 한 남자를 만났어요. 정말 다정했죠. 저를 절대 아프게 하지 않을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이 사람이 갑자기 저를 떠났어요. 무슨 일인지 잘은 모르지만, 너무나 단호한 말투로 헤어지자고 하더라고요. 세상이 무너져버렸어요. 매달리고 빌어도 봤지만 소용없었어요. 그때는 정말이지 죽고 싶었습니다. 어렵게 그 고통에서 헤어 나온 후로는 절대 사랑에 빠지지 않아요.
김 박사 = 아마도 심각한 우울증을 앓았을 거예요. 그 후 마음의 문이 더 단단히 닫혔겠군요.
페기 = 지금까지 이렇게 힘들게 살면서 어렴풋이 내 모든 문제가 아버지와 관련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한편으로는 마치 모든 내 불행의 근원이 아버지 때문이라고 핑계를 대고 사는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고요.
김 박사 = 아니에요. 아버지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는 데 동의합니다. 하지만 이 문제를 해결할 사람이 아버지는 아니지요. 당한 사람 입장에서 너무 억울하고 힘들겠지만, 결국 고통을 극복해야 할 사람은 자신이에요. 만약 페기씨가 미성년자라면 다음 상담에는 부모님이 오셔야 할 거예요. 부모가 빨리 그 잘못을 알고 개선해야 자녀에게 나쁜 영향을 안 줄 테니까요. 하지만 성인은 스스로 해결해나가야 해요.
페기 = 저도 알아요. 그런데 어떻게요? 어떻게 해야 남들과 마주할 때 두렵지 않죠? 어떻게 해야 누군가 제게 화를 내도 떨지 않고 서 있을 수 있죠? 어떻게 해야 내게 시킨 일이 부당하면 안 하겠다고 맞설 수 있죠? 도저히 할 수 없어요. 전 구제불능이라고요.
김 박사 = 그렇게 자책하지 마세요. 페기씨의 잘못이 아니잖아요. 지금의 고통에서 벗어나려면, 과거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고 받아들여 주세요. 아버지를 미워한 것이 죄는 아니에요. 폭력이 두려웠을 뿐이지요. 가족이니 참는 것이 정당하고 현명하다? 틀린 말이에요. 오히려 아버지니까 더 힘들 수밖에 없는 일이지요. 당연한 일이에요.
페기 = 저를 받아들이고 나면, 그다음에는 어떻게 하죠?
김 박사 = 자신의 행동과 감정과 생각이 왜 그렇게 움직이는지 알아봐야죠. 지속적으로 심리 상담을 받길 권해요. 어릴 적 트라우마는 쉽게 극복하기 어렵거든요.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에요. 그래서 상담의 목적은 완벽한 해방이 아닌 극복이랍니다. 두려움이 전혀 없는 상태가 아닌, 잘 이겨내고 평안한 삶을 누리는 것이 목표죠. 그러고 나서 다음 단계로 넘어가야 해요. 만약 자신의 상태를 정확히 잘 알지 못하고 섣불리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면, 그것은 마치 덜 마른 페인트를 손으로 만지는 것과 같아요. 자국이 남고, 어떤 경우에는 페인트칠을 하기 전보다 못하게 되니까요. 페기씨는 벌써 눈치를 챘을 거예요. 다음 단계가 무엇인지 말이에요.
페기 = 혹시 용서인가요?
김 박사 = 맞아요. 전에도 시도해본 적이 있죠?
페기 = 물론이죠. 아주 여러 번 아버지를 용서하고 이해해보려고 애썼어요. ‘먹고살기 위해서 그랬다, 원래 성격이 그럴 뿐이다, 거칠긴 하지만 나를 정말 사랑했으니 용서하자’고요. 그런데 도저히 안되더라고요.
김 박사 = 페기씨만 용서가 힘든 것이 아니에요. 모두에게 어려운 일이지요. 하지만 아주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에요. 캐나다의 심리학자 토머스 플란트 박사가 용서에 필요한 7가지 법칙을 이야기했는데, 많은 도움이 될 거예요. 첫 번째, 용서는 망각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에요. 폭력이라는 잘못된 행동이 잊힐까 걱정할 필요는 없어요. 두 번째, 용서는 피해자의 아픔을 축소시키는 것이 아니에요. 용서를 한다고 페기씨의 아픔이 대수롭지 않게 취급되지는 않을 겁니다. 세 번째, 용서는 바보나 하는 짓으로 여기는 경우가 있는데, 절대 약하거나 무력해서 용서하는 것이 아니에요. 네 번째, 용서에 가해자의 사죄와 화해가 반드시 선행되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에요. 불행하게도 사죄나 보상받지 못할 수 있지만, 용서는 나 자신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죠.
용서, 번번이 실패했어요
“상대방의 사죄에 집착하지 말고 분노를 놓아버려요, 당신을 위해”
페기 = 아, 저야말로 아버지가 용서를 빌면 모든 게 해결될 거라 생각했어요. 그런데 아무리 봐도 아버지가 누군가에게, 특히 가족에게 사과할 사람은 절대 아니었죠. 용서는 나를 위한 거란 말씀을 들으니 아버지의 태도 변화가 중요하긴 하지만 반드시 제 용서가 필요한 것은 아닌 것 같네요.
김 박사 = 네, 그렇습니다. 그리고 다섯 번째로 용서는 ‘과정’이라는 점입니다. 지금 어렵더라도, 시간이 흐르면 더 큰 용서를 할 수 있게 돼요. 여섯 번째는 용서는 바로 당신의 건강과 안녕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해요. 마지막으로 용서의 비법은 바로 분노를 놓아주는 것입니다. 렛잇고(Let it go)! 분노를 보내버리세요. 이제 페기씨의 선택에 달려 있어요. 분노에 사로잡혀 있을지, 아니면 용서할지 말이에요. 행복하게 살려면, 어떤 것을 선택해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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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과 전문의 김진세 박사는 슬럼프 극복을 위해 떠난 산티아고 순례길에서도 ‘길 위의 카운슬러’로 나섰던 천생 상담가다. 고려제일정신건강의학과 원장으로 20년 이상 진료실에서 상담을 하고, 정신 건강과 관련된 수백편의 글을 써왔다. 저서로 <심리학 초콜릿> <행복을 인터뷰하다> <태도의 힘> <길은 모두에게 다른 말을 건다> 등이 있다.
<김진세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