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를 거덜내는 탐욕바이러스
인간을 조종해 계층사회 만들어
허약한 인간이 살아남기 위해선
이성·생태·공감바이러스 키워야
인간은 큰 것을 짓거나 부술 수는 있지만 미세한 바이러스조차 감당할 수 없는 약한 존재임을 다시 한번 확인한다. 사명감 투철한 의학은 인간의 몸을 지키기 위한 전투에서 많은 성과를 냈다. 늘 그렇듯 지금의 사태 또한 인간 자신이 재촉했다. 스스로 바이러스의 숙주가 되길 자청했다. 인간을 조종하는 탐욕바이러스에 의해서다. 코로나19처럼 탐욕바이러스에 효과적인 백신은 현재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다. 실천 없는 처방만 난무한다.
코로나19와 탐욕바이러스는 닮은 점과 다른 점이 있다. 닮은 점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코로나19는 전자현미경이라야 볼 수 있다. 육안으로는 볼 수 없다. 탐욕바이러스 또한 저지른 일의 흔적을 보고 나서야 알 수 있다. 기획단계에서는 정체를 알 수 없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안티오이디푸스>에서 욕망의 대명사인 자본주의를 통해 ‘기관 없는 몸’이라고 한다. 이 양자는 증식만이 있다. 코로나19는 생물과 무생물의 중간체로 대사작용과 같은 생물학적 기능이 없다. 증식이 있을 뿐이다. 탐욕바이러스 또한 문명이라는 실체는 있는데 예측, 상상, 경쟁 등을 통해 무한히 확산된다.
다른 점은 코로나19는 원래 동물의 몸에 기생하고 있었으며, 탐욕은 지구를 거덜 내고 있는 인간의 몸에 기생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후자의 경우 최근 수많은 상을 휩쓸고 있는 영화 <기생충>에서 보듯이 인간사회를 계층화하는 데에 한몫하고 있다. 다를 것 없는, 같은 인간인데도 서로를 무시하고 배타적으로 대한다. 주거환경도 다르다. 욕망바이러스는 자신의 숙주가 사회적 신분이 상승될수록 다른 인간을 지배하게 한다. 그 진영에 들지 못한 인간에게는 자신을 어떻게 증강시킬 것인가 절치부심하게 한다.
사실 코로나19가 인간보다는 앞서 존재했다. 진화의 관점에서 본다면 인간은 후손에 해당한다. 오랫동안 서로 미지의 존재였으므로 적절한 거리를 두고 공존해야 함에도 탐욕바이러스는 코로나19를 인간의 몸에 불러 들였다. 새로운 숙주는 새 세상이나 다름이 없다. 인간과 문명의 이기를 통해 미개척의 영토로 진격하고 있다. 욕망바이러스의 아성인 도시는 해방공간이나 다름없다. 애석하게도 저항력 없는 수많은 사람이 쓰러지고 있다.
다행히 인간의 마음에는 백신을 만들어내는 번뜩이는 이성바이러스도 있다. 과학성과를 공유하며 삶의 환경을 부단히 개선해온 바이러스다. 머지않아 코로나19에 대한 백신을 만들어낼 것이다. 공진화하는 변종이 생기더라도 집단지성으로 대응할 수 있다. 허약한 인간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서로 도와가며 척박한 환경을 극복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참에 욕망의 맹목적인 요구대로 자연을 갈취했던 도구적 이성은 반성과 함께 새로운 길을 물색해야 하리라.
나아가 욕망 대신에 지구의 모든 생명체가 공존하며 상생하는 생태바이러스를 키워야 한다. 욕망바이러스가 창궐하는 현대문명은 한계에 이르렀다. 그 이유는 인간이 지구의 정복자라는 착시현상에 있다. 지구는 수백만 종의 생명체가 함께 사는 유일한 낙원이다. 누가 독점할 수는 없다. 코로나19는 그 오만에 대한 항거다. 이 뒤에도 수많은 바이러스와 세균들이 인간을 숙주로 둔 욕망에 도전할 것이다. 모리오카 마사히로는 <무통문명>에서 우주와 소통하는 인간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인간가축화에 매몰된 신체의 욕망에서 벗어날 것을 주문한다. 중용과 조화를 통한 문명의 질적 전환을 가져올 때가 되었다.
인간은 또 공감바이러스를 가지고 있다. 이웃나라에서 수천명이 유명을 달리하는 이때, 우리는 애도해야 한다. 이들은 인류의 잘못을 자신의 목숨으로 대신한 대리고(代理苦)를 짊어진 자들이다. 가슴을 열고 이 영혼들이 고통 없는 천국으로 가도록 기원해야 하리라. 그리고 마스크 속으로 잠적한 말은 잊어버리고 침묵해야 한다. 단절된 일상, 낯설고 때로는 고통스러운 풍경이 우리 인간에게 어떤 의미를 던져주고 있는지 깊이 생각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