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 의견이 논의의 장작”…노동·산업 전환도 ‘사회적 대화’
디지털 기술의 발전으로 경계가 허물어지는 일과 삶을 더 좋게 만들기 위해 사회는 무엇을 해야 할까. 경향신문이 ‘녹아내리는 노동, 내:일을 묻다’ 기획 시리즈를 시작한 뒤 줄곧 던진 질문이었다. 우선 ‘일하는 모두를 위한 사회안전망’이 필요하다는 점이 분명해졌다. 사회복지제도는 사용자·근로자의 일대일 고용관계를 기초로 만들어져 그런 관계에 속하지 않은 대다수 일하는 사람들의 삶을 안정시키는 데 한계를 노출하고 있다.
가장 기본적인 안전망은 일하다가 다치거나 죽지 않을 ‘안전’과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을 정도의 ‘소득’이다. 플랫폼 경제의 특성상 노동자가 여러 플랫폼을 통해 일한다는 이유로 기업들이 노동자의 산업재해 책임을 지지 않는 현실을 고쳐야 한다. 다중추돌 교통사고의 책임 비율을 나누는 것이 가능하다면, 한 노동자에 대한 여러 사용자의 산재책임 비율을 나누는 것도 가능하다.
크라우드웍스 작업자, 배달노동자 같은 플랫폼의 일감 노동자만이 아니라 웹소설을 쓰는 프리랜서, 영세 자영업자에 이르기까지 일하는 모든 이가 일거리가 없어지거나 가족 돌봄을 해야 할 때를 대비한 안전장치도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 ‘근로자’에게만 주어지는 고용보험 혜택을 일하는 모든 사람으로 확대하는 방안을 논의해볼 수 있다.
노동연계 복지만으로 촘촘한 사회안전망을 만들기는 점점 어려워지는 것이 현실이다. 전통적인 안전망의 확대뿐만 아니라 기본소득 논의가 병행될 필요가 있다. 기본소득은 노동시장의 공식 영역에서 배제된 가사·돌봄 노동을 성평등하게 배분하고, 노동자에게 ‘시간주권’을 부여해 기술변화에 적응할 재교육 접근을 용이하게 할 수 있다. 기본소득은 기존 안전망의 대체재가 아니라 보완재로서 노동자의 교섭력을 전반적으로 강화할 수 있는 방안으로 여겨진다.
끝으로 이런 논의를 전사회적으로 하는 분위기가 필요하다. 그것은 국가와 정치의 역할과 관계있다. 노사정이 ‘노동 4.0’이라는 사회적 대화로 문제를 해결해온 독일의 사례가 좋은 참조점이 될 수 있다.
“제가 자란 도시는 인구 5만명 중 1만명이 자동차산업으로 먹고살았습니다. 지금은 800명으로 줄었습니다. 이러한 고용 감소는 자동차산업뿐 아니라 제조업 전반에서 보이는 현상입니다.”
지난 10일 독일 남서부 루트비히스하펜의 한 극장. 연방노동사회부 후베르투스 하일 장관이 마이크를 잡았다. 그는 지난해 9월부터 독일 전역을 돌며 ‘밖에서 듣다(Hin. Gehort)’라는 이름의 사회적 대화로 진행하고 있다.
화학회사에서 46년 근무한 뒤 은퇴한 연금생활자, 6년 전 독일로 온 이라크 난민, 휠체어를 타고 온 중증장애인, 지역노조 활동가, 연방국회의원까지…. 시민들이 살아온 배경은 저마다 달랐지만, 디지털화로 달라지는 노동시장의 변화를 토론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행사에 참여했다.
루트비히스하펜은 세계 최대 화학업체 바스프의 본사와 최대 규모의 화학공장단지가 있는 산업도시다. 17만 인구의 20% 이상이 바스프에 고용돼 있을 정도로 이 기업에 대한 경제적 의존도가 높다. 독일 주요 제조업 기업들과 마찬가지로 바스프도 작업 공정의 자동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그는 독일 평균보다 높은 루트비히스하펜의 실업률이 이러한 산업구조 변화와 관계가 있다고 했다.
하지만 하일 장관은 “이런 변화까지도 긍정적으로 본다”며 “이 변화가 사회적으로 무리 없이 진행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정치의 역할이다. 이를 위해 저는 정부 정책이 여러분들의 일상생활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알고 싶다”고 말했다.
그의 낙관주의에는 독일의 전통이기도 한 사회적 합의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이 깔려 있다. 이는 노동의 미래라는 크고 논쟁적인 주제에서도 마찬가지다. 노동조합이나 시민들도 사회적 대화에 적극 참여해 각자 입장을 개진하는 쪽을 택한다.
■ 적극적인 시민 참여
디지털화로 인한 노동변화 논의
5년 전 정부 주도 ‘노동 4.0’ 출범
‘백서’ 발간 후 지금도 대화 지속
독일 ‘노동 4.0’은 디지털화가 노동시장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논의한 사회적 대화 모델이다. 2011년 정부 주도로 출범한 제조업 혁신 전략 ‘산업 4.0’에 노동의 목소리가 빠져 있다는 지적이 제기되면서 노동부가 추진했다. 1년 반 동안 각종 경제단체와 기업들이 제출한 소견서, 전문가 200여명과 시민 1만2000여명이 참여한 토의 결과 등을 종합해 8개 정책과제를 담은 2016년 백서를 발간했다.
지금도 대화는 계속되고 있다. 인근 만하임에서 학습취약계층 아동들을 상대로 직업교육 상담을 하는 크리스토퍼 파르티에는 “이민자나 저소득층 가정의 아이들 일부는 태어나서 한번도 컴퓨터를 보지 못했다. e메일을 쓰는 법도 모른다”며 “이런 아이들이 미래에 어떤 직업을 가질 수 있을지, 어떤 지원이 필요할지 정부 대책이 궁금해서 왔다”고 했다.
시민들은 정부가 대책을 마련하기까지 마냥 기다리고 있지 않았다. 삶에서 체감한 우려를 가감 없이 표현하고 구체적인 정책 대안을 제안했다. 삶과 노동, 변화의 현장, 사회보장제도, 미래의 노동이라는 네 가지 주제로 시민 20~30명씩 조를 나눠 토론하는 시간도 있었다. 미래의 노동을 택한 시민들에겐 ‘빠르게 진행되는 노동시장 변화에 정치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겠느냐’는 질문이 주어졌다.
지역고용센터 소장이라고 소개한 한 참가자는 “실업급여액이 너무 적다보니 적성에 맞지 않고 임금이 낮은 일자리라도 일단 들어가게 된다”며 실업급여 인상을 요구했다. 숙련인력 부족도 관심사였다. 한 참가자는 “다른 유럽연합 국가 출신 숙련인력들의 취업이민을 장려하고 있지만 자격증 인정 요건이 주마다 달라 취업에 제한이 있다”며 “연방 차원에서 통일해야 한다”고 말했다.
토론에 배석한 정부 관계자는 시민들의 얘기를 들은 뒤 정부가 추진 중인 정책을 설명했다. 한 참가자가 “돌봄 일자리 수요는 더 늘어날 텐데 처우가 너무 열악하다”고 지적하자 “지난해부터 돌봄 일자리를 대상으로 법정 최저임금을 올렸다”고 답하는 식이었다. 재교육 제도를 어떻게 개편할지, 노동시간 유연화에서 주의해야 할 점은 무엇인지 의견을 들은 장관은 행사 말미에 “여러분들의 의견이 (논의의) 장작이 될 것”이라고 했다.
■ 최소한의 사회적 합의
독일도 환경과 차 산업 갈등부터
노사, 노동 유연화 입장차 크지만
노조·시민들 외면 아닌 의견 개진
사회적 합의에 기반한 해법을 추구한다고 해서 갈등이 없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더 첨예하게 대립하는 경우가 많다. 이날 토론 도중 한 참가자는 “기후변화, 배출감축, 환경 다 좋은 말이다. 하지만 자동차산업의 전기차 전환을 추진하면서 일자리 대책을 제대로 마련하지 않는다면 좋아할 사람이 있겠느냐”고 고성을 질렀다.
4차 산업혁명 논의 시작된 한국
‘노사정 대화’ 시도 있었지만
시민·노조 유의미한 참여 없어
사회 곳곳 목소리 낼 ‘창구’ 필요
노동 4.0 대화 과정에서도 노사의 이해관계가 엇갈린 부분은 많았다. 노동 시간과 장소의 결정권을 둘러싼 논쟁이 대표적이다. 디지털화된 시대에 노동 시간과 장소가 지금보다 더 유연해져야 한다는 점에 노사 모두 동의했지만, 이들이 바라는 유연화의 모습은 달랐다.
사용자단체는 디지털화된 시대에 법적 근로시간 규제가 더 유연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노동시간을 하루가 아닌 1주일 단위로 측정하게 하고, 최소 11시간 휴식 규정도 손봐야 한다는 것이다. 독일사용자연합연방총연맹은 논의 과정에서 “한 여성 근로자가 저녁에 영화를 보고 귀갓길에 급하게 e메일을 열어보고 답장했어도 다음날 오전 8시에 다시 업무를 이어나갈 수 있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노조는 반대했다. 노동자의 일과 삶의 균형을 무너뜨리고 ‘시간 주권’을 빼앗을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독일 통합서비스노조의 미카엘 피셔 정책기획실장은 인터뷰에서 “지금 어떤 사람이 밤늦게 e메일을 보낸다 해도 그건 그들의 선택”이라며 “노동법을 바꾸는 순간 (고숙련·고소득 지식 노동자뿐 아니라) 모두에게 그렇게 일하라고 강요하는 결과가 될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최소한의 합의’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디지털화에 제대로 대응하려면 노사 모두 현행 노동시간이 지금보다는 유연해져야 하고, 이것이 양자 간 합의로 이루어야 한다는 원칙에 공감했다. 법 규정을 기업별 상황에 맞게 적용할 수 있도록 단체협약을 맺어야 한다는 방법론에도 공감했다.
■ 국가와 정치의 역할은
한국에서는 ‘4차 산업혁명’ 논의가 본격화하고 있지만 기업과 정부의 목소리에 비해 시민과 노동자들의 유의미한 참여는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위원들의 면면도 정부와 기업계 인사들만 있을 뿐이다.
대통령 직속 4차산업혁명위원회는 지난해 10월 내놓은 대정부 권고안에서 “실리콘밸리에서 출퇴근 시간을 확인하는 회사는 없다”며 주 52시간제의 일률적 적용을 경제성장과 경쟁력 하락 요인으로 꼽았고, 뒤늦게 노동계가 반발했다. 지난해 12월 경제사회노동위원회에서 ‘한국형 노동 4.0’ 보고서를 채택하는 등 노사정 대화 시도가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논의 과정에 시민들의 참여가 부족했고 대표성 논란도 끊이지 않는다.
독일의 사회적 합의 문화를 연구한 이진 베를린 정치+문화연구소장은 “독일에선 정부 주도 협의체에 참가하는 대표가 아니라도 노조, 언론, 시민단체 등 사회 곳곳에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창구가 많이 마련돼 있다. 이를 통해 충분한 소통과 숙의가 가능해야 보다 많은 주체가 동의할 수 있는 사회적 합의도 도출할 수 있다”고 말했다.
독일 연방노동사회부 차관 비욘 뵈닝 인터뷰
독일의 사회안전망은 ‘고용관계’를 기반으로 짜여 있다. 임금과 노동시간은 고용주와 노동조합의 단체협약을 통해 결정된다. 그런데 지금 내 일자리가 당장 한 달 뒤에도 남아 있으리라 보장할 수 없는 ‘녹아내리는 노동’의 시대에도 이런 해법이 유효할까.
사회민주당 소속으로 연방노동사회부에서 ‘노동의 미래’ 정책을 총괄해온 비욘 뵈닝 정무차관(42·사진)의 대답은 “그렇다”이다. 그는 최근 경향신문과 e메일 인터뷰를 하면서 향후 5년간 없어질 일자리보다 새로 생겨날 일자리가 더 많다는 자체 조사 결과를 언급하며 “소득이 있는 일자리는 미래에도 여전히 우리 사회에 중추적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일자리는 사라지지 않으며, 다만 하는 일이 달라질 뿐이라는 것이다.
그 연장선에서 국가와 정치의 역할은 새로 생겨나는 일들을 좋은 일자리로 유지하고, “오늘의 노동자가 내일의 노동을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것”이 된다. 뵈닝 차관이 재교육 제도 강화를 여러 번 강조한 이유이기도 하다. 다음은 일문일답.
- 독일 정부는 노동의 미래에 대해 낙관적인 듯하다.
“노동 세계는 거대하고 급격한 변화를 겪고 있다. 디지털 기술이 변화의 결정적 동력이고 위기와 기회를 모두 가져올 것이다. 독일에서는 향후 5년간 130만개 직업이 사라지는 반면, 210만개의 새로운 직업이 생겨날 것이다. 그로부터 10년 뒤엔 330만개 직업이 생기고 400만개가 사라질 것이다. 우리는 일자리를 잃는 게 아니라 다른 종류의 일을 하게 될 것이다. 이 전환을 사회적 진보로 만드는 게 정부와 사회적 대화 파트너인 노사의 역할이다.”
- 노동의 미래에서 가장 중요하게 보는 것은.
“끊임없는 재교육이다. 2016년 고용보험보장 및 직무능력향상촉진법에서는 저숙련 노동자나 장기실업자, 2019년 직업향상기회법에선 나이나 회사 규모에 상관없이 일자리 대체 가능성이 높은 모든 노동자의 재교육 접근성을 높이려고 했다. 이어 지금 논의 중인 ‘내일의 노동’법을 통해 재교육 기회를 더 확장하려 한다. 가령 내연기관 생산 자동차회사에서 일하던 기술자가 전기차 생산을 위한 재숙련교육을 받는 회사 내 교육도 촉진할 것이다. 우리는 더 이상 회사에 남아 있을 수 없는 노동자들이 버려지지 않도록 할 것이다.”
- 노동시간을 유지하면서 재교육을 받으려면 노동자들에겐 부담일 텐데.
“노동시간 단축 지원책을 확대하면서 이를 재교육과 결합하려 한다. 회사 전체가 장기간의 경기 침체 등으로 어려움을 겪는 경우 조업단축수당이 있다면 경기가 다시 좋아질 때까지 아무도 해고당하지 않아도 된다. 조업단축 기간에 직업교육이 제공된다면 보조금 지급 기간을 12개월에서 24개월로 늘리는 식으로 인센티브를 줄 수 있다.”
- 기본소득 논의는 활발하지 않은데 .
“노동부는 2018년부터 ‘새로운 노동, 새로운 사회안전망’을 주제로 한 사회적 대화에서 기본소득도 다뤘다. 하지만 우리는 이 개념을 받아들이지 않기로 했다. 우리는 앞으로도 소득이 있는 일자리가 중심적 역할을 할 것이라 믿는다. 일은 충분한 소득 그 이상이다. 기본소득은 고용의 연속성을 담보할 수 없다. 실업자들에겐 장기실업수당이 기본소득 역할을 대신해줄 것이다.”
- 자택근무권을 명시한 법안을 추진 중인데.
“집권 기민·기사연합과 사민당 연정은 노동 장소의 유연성을 늘리는 큰 방향에 합의했다. 이를 위한 법조문 협의를 하고 있다. 직장생활에서 더 유연한 해법을 찾아야 하지만 어떤 확고한 모델을 만들려는 것은 아니다. 구체적인 것은 고용주와 피고용인 사이의 단협에서 결정돼야 한다. 중요한 것은 일하는 방식을 삶의 방식에 맞춰야지, 그 반대가 돼선 안된다는 점이다.”
- 노동시간이 줄면 임금도 준다. 저임금 노동자의 안정적 소득을 보장할 방법은.
“단협을 적용받는 기업과 피고용인 수는 줄고 있다. 단협 밖에 있는 노동자들도 보호가 필요하다. 최저임금만으론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단협 적용 범위를 더 넓혀야 하고, 연정 내에서 이 목표를 달성할 방안을 논의할 것이다.”
< 시리즈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