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금노동자에만 보장된 사회안전망, ‘일하는 모두’의 권리로

손제민·정대연·최미랑·심윤지 기자
일러스트 | 김상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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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일’과 ‘내 일’을 잇는 사회적 대화를 시작하자

디지털 기술의 발전으로 경계가 허물어지는 일과 삶을 더 좋게 만들기 위해 사회는 무엇을 해야 할까. 경향신문이 ‘녹아내리는 노동, 내:일을 묻다’ 기획 시리즈를 시작한 뒤 줄곧 던진 질문이었다. 우선 ‘일하는 모두를 위한 사회안전망’이 필요하다는 점이 분명해졌다. 사회복지제도는 사용자·근로자의 일대일 고용관계를 기초로 만들어져 그런 관계에 속하지 않은 대다수 일하는 사람들의 삶을 안정시키는 데 한계를 노출하고 있다.

가장 기본적인 안전망은 일하다가 다치거나 죽지 않을 ‘안전’과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을 정도의 ‘소득’이다. 플랫폼 경제의 특성상 노동자가 여러 플랫폼을 통해 일한다는 이유로 기업들이 노동자의 산업재해 책임을 지지 않는 현실을 고쳐야 한다. 다중추돌 교통사고의 책임 비율을 나누는 것이 가능하다면, 한 노동자에 대한 여러 사용자의 산재책임 비율을 나누는 것도 가능하다.

크라우드웍스 작업자, 배달노동자 같은 플랫폼의 일감 노동자만이 아니라 웹소설을 쓰는 프리랜서, 영세 자영업자에 이르기까지 일하는 모든 이가 일거리가 없어지거나 가족 돌봄을 해야 할 때를 대비한 안전장치도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 ‘근로자’에게만 주어지는 고용보험 혜택을 일하는 모든 사람으로 확대하는 방안을 논의해볼 수 있다.

노동연계 복지만으로 촘촘한 사회안전망을 만들기는 점점 어려워지는 것이 현실이다. 전통적인 안전망의 확대뿐만 아니라 기본소득 논의가 병행될 필요가 있다. 기본소득은 노동시장의 공식 영역에서 배제된 가사·돌봄 노동을 성평등하게 배분하고, 노동자에게 ‘시간주권’을 부여해 기술변화에 적응할 재교육 접근을 용이하게 할 수 있다. 기본소득은 기존 안전망의 대체재가 아니라 보완재로서 노동자의 교섭력을 전반적으로 강화할 수 있는 방안으로 여겨진다.

끝으로 이런 논의를 전사회적으로 하는 분위기가 필요하다. 그것은 국가와 정치의 역할과 관계있다. 노사정이 ‘노동 4.0’이라는 사회적 대화로 문제를 해결해온 독일의 사례가 좋은 참조점이 될 수 있다.


일러스트 | 김상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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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 좋은 일과 삶을 위해

디지털 기술이 강제하는 ‘녹아내리는 노동’의 시대에 현행 노동법과 사회보험 체계는 ‘구멍이 너무 많은 그물’이다. 19세기 이후 산업혁명 시대에 노동자를 보호하는 사회·경제적 시민권의 원천이었지만 이제 한계를 노출하고 있다. 공장제 노동을 표준으로 임금노동에 기반한 그 체계는 지금 시대의 변화를 충분히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변화의 속도에 노동의 권리와 보호가 따라가지 못하는 지체현상도 보인다.

법상 ‘근로자’ 밖 노동자들은 분명 존재하지만 그들은 ‘표준노동’에서 벗어나 있기에 사회·경제적 ‘시민권’을 얻기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그들은 지금 실업·질병·재해·은퇴 등 위험에 대비한 안전망의 바깥에 존재한다. ‘녹아내리는 노동’을 하는 이들이 증가하는 상황에서 ‘일하는 모두’의 권리를 어떻게 보장할지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지는 이유다.

■ ‘근로자’에서 ‘일하는 모두’로

다양한 형태 노동자 보호 위해
법상 ‘근로자’를 ‘취업자’로 변경
고용형태 무관한 사회보험 필요

사회안전망에서 벗어난 다양한 형태의 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해 시민권을 부여받는 법상 ‘근로자’를 ‘취업자’로 바꿔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김종진 한국노동사회연구소 부소장은 “근로자든 개인사업자든 상관없이 소득에 비례해 사회보험료를 부과하고 이들 모두에게 사회보험을 적용할 정책을 모색해야 한다”고 말했다.

프랑스는 고용형태와 무관한 새로운 사회보험체계를 구축해 자영업자에게도 사회보험을 적용하기 시작했다. 우루과이도 노동자와 자영업자를 구분하지 않고 단일한 사회보험을 통해 이들을 동등하게 보호하고 있다.

국제기구에서도 ‘일하는 모두’를 보호해야 한다고 권고한다. 국제노동기구(ILO)는 지난해 6월 ILO 총회에서 채택한 ‘일의 미래를 위한 100주년 선언’에서 디지털 노동으로의 전환에 대응하는 사회보장 원칙 중 하나로 ‘보호범위의 보편성’을 제시했다.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도 “고용돼 있거나 자영업에 종사하는 모든 사람이 사회적 보호에 공식적·효과적으로 접근할 수 있도록 보장해야 한다”는 원칙을 내놨다.

이를 위해 일부 업종 노동자를 ‘특수형태근로종사자(특수고용노동자)’라는 이름으로 제한적 가입이 가능하게 한 산재보험부터 현실성 있게 바꿔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아울러 고용보험 적용 대상을 확대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특고 노동자는 주로 하나의 업자로부터 업무를 의뢰받아 그 업무를 해야 하는 ‘전속성(專屬性)’이 있어야 산재보험 가입이 가능하다. 하지만 플랫폼노동자들은 한 플랫폼만 이용해선 충분한 소득을 올리기 어려워 여러 플랫폼에서 일감을 받는 경우가 많다. 기술변화로 다수 사용자로부터 일감을 얻는 게 가능해지기도 했다. 이로 인해 특고 노동자의 산재보험 가입률은 낮다. 지난해 11월 국가인권위원회는 ‘플랫폼노동 종사자 인권상황 실태조사’ 연구용역 보고서에서 “대리운전 종사자는 8만~11만명으로 추정되지만 근로복지공단에서 파악한 전속성 있는 노동자는 9명뿐”이라고 밝혔다.

대통령 직속 사회적 대화기구인 경제사회노동위원회 ‘디지털 전환과 노동의 미래 위원회’는 지난해 12월 ‘디지털 전환 시대 노동의 미래를 위한 도전과 과제: 노사정 보고서’에서 “먼저 특고에 해당하는 플랫폼노동자의 경우 고용보험 적용을 추진하고 산재보험은 적용 확대와 함께 실질적 보호를 강화하도록 정책을 추진해야 한다”며 “‘전속성’ 대신 ‘경제적 종속성’으로 적용 직종을 확대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일러스트 | 김상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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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당 수수료’처럼 사회보험료 징수

전속성 떨어지는 플랫폼노동자
사회보험료 건별로 징수하는 등
산재보험 가입 현실성 있게 개선
고용보험 대상 확대해 나가야

노동자가 여러 플랫폼을 이용할 경우 보험료를 어떤 플랫폼이 부담할 것인가가 문제 된다. 현 제도는 사업주가 동시에 여럿인 경우를 설정해 두지 않고 있다. 한국의 경우 플랫폼기업과 노동자 사이에 중간업체가 끼어있어 사업주 특정이 더 어렵다.

건당 수수료처럼 건별 보험료 부과체계를 도입하는 방법을 고려해 볼 수 있다. 개인의 소득 전체를 합산해 사회보험료를 청구하는 것이 아니라 업무처리 건별로 청구하는 것이다. 플랫폼노동자가 일한 모든 정보가 플랫폼업체에 축적돼 있어 기술적으로 어렵지 않다는 지적이 나온다. 박정환 민주노총 서비스연맹 정책국장은 “거래마다 보험료를 부과하게 된다면 산재보험 가입 범위는 지금보다 훨씬 더 넓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일자리가 아닌 일거리 단위 노동을 하는 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한 시도는 세계적으로 다양하게 이뤄지고 있다. 2018년 전미가사노동자연맹은 ‘이동형 복지(portable benefits)’를 제공하는 온라인 플랫폼 ‘알리아(Alia)’를 시험 도입했다. 고객 또는 플랫폼이 희망할 경우 일정 금액의 보험료를 납부하면 노동자의 알리아 크레디트로 적립되고, 노동자는 이를 모아 유급휴가, 장애·상해·생명보험 등 복지혜택을 구매할 수 있다. 알리아는 기존 ‘프리랜서 공제회’보다 진일보했지만, 보험료 납부의 강제성이 없어 한계가 있다.

엔초 베버 독일 고용연구원 연구부장은 플랫폼노동자가 한 업무을 마칠 때마다 개인 ‘디지털 사회보장(DSS)’ 계좌로 보수의 일정분이 이전되는 방식을 제안했다. 이렇게 모인 사회보장 분담금은 노동자가 거주하는 국가의 사회보장제도로 정기 이전된다.

그는 지난해 12월 서울에서 국무총리 직속기구인 사회보장위원회가 주최한 ‘미래 환경 변화와 사회보장의 미래’ 국제학술대회에 참석해 “자영업자를 위해서도, 거대한 회색지대에서도, DSS는 실제적인 공백을 채울 수 있다”며 “노동자, 고객, 플랫폼 중 누가 더 경제적 부담을 지게 되는가는 시장의 탄력성에 달려있다”고 말했다.

■ 직업훈련은 시민적 권리

노동변화에 직업훈련 중요성 강조
젊을수록 ‘숙련도 향상’ 요구 높아
정부, ‘국민내일배움카드’ 도입

변화하는 노동 형태에 대응하기 위해 직업훈련의 중요성이 강조된다. 경향신문이 지난해 12월 민주노총 등과 함께 노동자 1554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기술변화로 인한 노동 불안정 문제를 극복하기 위한 대책’을 물었더니 ‘재교육·평생교육 기회 강화’(30.5%)가 ‘노조할 권리 확대’(36.4%)에 이어 7개 문항 중 2위를 차지했다(2개 선택). 20~30대와 일터에 노조가 없는 경우에는 1위였다. 앞으로 일을 통해 먹고살아야 할 기간이 길수록, 그리고 노조라는 집단적 힘을 통해 불안정한 일자리를 지키기 어려울수록 직업훈련을 통해 숙련도를 높이려는 요구가 크다는 의미다.

응답자 절반 이상(53.3%)이 실직 우려 등으로 새로운 기능을 익힌 경험이 있는데, 학습 비용은 주로 개인(78.8%, 중복응답)이 부담했다. 고용노동부 조사에서도 기업들이 자체 직업훈련을 실시하는 비중이 지속적으로 감소하는 추세가 나타났다. 이승윤 이화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디지털 자본주의에서 숙련의 정도는 갈수록 중요해지지만 노동이 녹아내리는 시대에 숙련 형성은 더 사적화, 비공식화하고 있어 노동자 부담이 증가한다. 교육과 숙련 형성 기회에서 공공성을 보다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정부는 지난 1월 기존 ‘내일배움카드’보다 지원 대상과 기간, 액수를 확대한 ‘국민내일배움카드’ 제도를 도입했다. 이전에는 실업자·재직자로 나눠 운영돼 왔는데, 소득이 일정액 이하이면 실업자, 재직자, 특수고용노동자, 자영업자에 상관없이 누구나 같은 카드로 직업훈련 지원을 받을 수 있게 됐다.

노동부는 “특수형태근로종사자·자영업자·불완전취업자가 증가하고, 실업과 재직 간 변동이 증가하는 등 노동시장이 변화함에 따라 직업훈련 사각지대를 없애기 위한 것”이라고 밝혔다. 경사노위는 앞선 ‘노사정 보고서’에서 “공공재로서의 직업능력개발을 시민적 권리로 규정해 교육·훈련을 위한 노동자의 휴가권 보장과 직업훈련을 위한 생계보장 등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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