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 원상태로 돌려주는 것이
코로나19의 궁극적 대책 될 것
치료는 자연과의 조화와
평형을 유지하는 것이다
과연 우리가 아는 것은 무엇인가. 코로나19는 왜 존재하며, 어떻게 그렇게 긴 세월을 생존해왔는가. 빠른 확산을 지휘하는 이 바이러스의 사령부는 어디에 있을까. 설사 그들을 퇴치한다고 해도 승리한 것일까. 이 사건은 관찰하고, 진단하고, 실험하는 근현대 의학의 한계를 보여준다. 의학은 병의 이름을 새롭게 짓기도 하고, 인식하지 못하던 병원체를 찾아내기도 한다. 그러나 모든 병의 존재 이유를 다 해명할 수는 없다. 묵묵히 최선을 다하는 의료인들은 때로는 원인 부재의 전쟁터로 보내야만 하는 전사이기도 하다.
그런데 의료인들의 사명이 명시된 히포크라테스 선서는 1948년 세계의사협회 총회에서 발의하여 만든 제네바 선언문이다. 나치에 협조했던 의료인들의 비인도적 행위를 뉘우치며 심기일전하고자 한 것이다. 따지고 보면 지금 세계가 공황상태에 빠진 것은 의료계를 움직이는 정치인들이 의료의 공공성을 무시하고 배제한 결과다. 정치는 예방하고, 처방하고, 반성하는 다른 차원의 의료시스템이다. 그런데도 정치는 인간끼리의 싸움에는 능숙하지만, 작은 존재의 침투에는 허점투성이다. ‘전시체제’라지만 자신에게 선전포고하고 자신과 싸우는 것이다. 세계가 칭찬하듯이, 한국의 ‘투명성과 공동체 의식, 월등한 의료기술’은 정치참여의 효과다. 우리는 무엇보다 삶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촛불을 들고 광장으로 나서지 않았던가.
알제리 해방전선의 투사 프란츠 파농은 정신의학자로서 앞서 민중의 고통의 뿌리가 식민지에 있음을 깨달았다. 자유와 인권이 식민지 지배계급에 의해 억눌려 신경증 등의 정신장애로 고통받는다고 보았다. 사실 주체성을 말살하는 식민지 자체가 거대한 병동이다. 그는 의료 행위를 청진기에서 총으로 전환했다. 마침내 알제리는 병동을 해체할 수 있었다. 이제 그러한 식민지는 의료의 영리추구라는 자본의 영역이 되었다. 지금 저마다 가슴을 쓸어내리는 이유는 권력의 사유화에 취한 정권이 추진하고자 했던 그것이 그나마 좌초되었기 때문이다.
거의 모든 인류는 자본주의에 의한 신경강박증에 걸려 있다. 피라미드형 부의 편재는 갈수록 집단적 질병을 양산할 것이다. “전염 사슬은 낮은 수준에서 계속될 것”이라는 세계보건기구(WHO)의 언급은 이미 자본의 태생과 함께 진행되어 왔다. 자본은 인간이 창안한 것이다. 병 또한 인간의 마음이 불러일으킨다. 명의 허준이 같은 증상을 놓고, 다르게 처방을 한 이유다. 분해하고 분석하는 것만으로 병을 치료할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석존 스스로 대의왕(大醫王)이라고 선언한 것이나 우리가 예수를 영적 의사로 우러르는 것은 병맥의 근원이 마음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다시 온다면 자본의 포로가 된 병든 사회에 먼저 메스를 들이댈 것이다.
코로나19는 박멸할 수 없다. 그들 또한 지구의 주인이다. 야생의 본가로 돌아가게 하는 것뿐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은 부조리하거나 쓸데없는 것 하나 없는 일종의 우주적 직인(職人)이라고 한다. 파괴한 자연을 원상태로 돌려주는 것이 코로나19의 궁극적 대책이 될 것이다. 따라서 의료의 목적 또한 바뀌어야 한다. 당장 아픈 사람을 고치는 일도 필요하지만, 고통의 발생을 방지하는 것이다. 치료는 자연과의 조화와 평형을 유지하는 것이다. 나아가 의료적 관점에서 병든 문명을 진단하고, 재설계해야 한다.
그러니 의료는 진정한 정치의 영역이다. 인위적이고 폭력적인 모든 환경 변화에는 인간의 건강권이 반드시 반영되어야 한다. 행복권과 관계 깊은 건강권은 헌법에 명문화된 가치다. <침묵의 봄>에서 레이철 카슨이 DDT 오염으로 “미국에 봄이 와도 자연은 침묵하고 있다”고 한 것처럼, 숱한 생명체가 서로 의지해 있는 생태 고리가 맹목적 욕망으로 끊어지는 불행을 막는 정치가 되어야 한다. 코로나19는 자본과 권력독점의 그물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는 전 세계의 정치적 실패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깊이 생각하고 투표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