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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심히 동료를 짓밟고 정상에 올라보니 아무것도 없어 허탈해요

  • 김진세

“나만의 길이 아니라 모두의 길을 따라갔기 때문이에요”

1972년 출간 이후 스페인, 독일, 네덜란드 등지에서 수백만부가 팔린 <꽃들에게 희망을>의 저자 트리나 폴러스는 1999년 한국어판에 “세상이 꽃으로 가득 차려면 수많은 나비가 필요하다”며 “변화에 맞서고, 흔히 불행하기 쉬운 혁명을 이해하기 위해 애쓰는 위대한 한국인들에게 감사한다”는 인사를 남겼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1972년 출간 이후 스페인, 독일, 네덜란드 등지에서 수백만부가 팔린 <꽃들에게 희망을>의 저자 트리나 폴러스는 1999년 한국어판에 “세상이 꽃으로 가득 차려면 수많은 나비가 필요하다”며 “변화에 맞서고, 흔히 불행하기 쉬운 혁명을 이해하기 위해 애쓰는 위대한 한국인들에게 감사한다”는 인사를 남겼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금주의 내담자(18) ‘꽃들에게 희망을’의 호랑 애벌레

“온갖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진정한 자아를 찾아나선 한 애벌레의 이야기”를 담은 트리나 폴러스의 1972년작 우화 속 주인공. 아늑한 알을 깨고 나와 무럭무럭 자라던 호랑 애벌레는 그저 먹고 크는 것만이 삶의 전부가 아니라는 생각으로 세상에 나와 바삐 움직이는 애벌레 떼를 마주한다. 그들이 향하는 곳엔 자신이 찾는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로 호랑 애벌레는 대열에 동참한다.



호랑 애벌레 = (의자에 기어오르며) 제가 움직임이 좀 둔해 보이죠. 생긴 것도 다른 내담자와는 좀 다르고요. 신경 쓰이지는 않으세요?

김 박사 = 몸의 줄무늬를 보니 호랑 애벌레이신 거 같네요. 이 상담실에 워낙 다양한 분들이 오셨거든요. 편하게 말씀하세요. 어떤 문제를 상담하시고 싶은가요?

호랑 애벌레 = 제가 상담을 온 이유는 결정을 내리는 것이 너무 어려워서예요. 짬뽕이냐, 짜장면이냐 고르기 힘든 경우를, 결정장애 또는 선택장애라고 한다면서요? 저도 선택장애 아닌가 싶어요.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 고민이거든요.

김 박사 = 모든 선택이 쉽지는 않죠. 물론 별 생각 없이 척척 해내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 사람들에게는 어려운 숙제예요. 하나를 선택하는 순간, 다른 하나는 포기해야 하니까요. 특히나 중요한 선택이라면 더욱 힘들 수밖에요. 구체적으로 어떤 선택의 고민인가요? 그리고 가능하면 ‘장애’를 사회현상 뒤에 접미사처럼 붙이는 일은 지양했으면 해요. 지나치게 부정적인 이미지를 각인시키면 좋지 않으니까요.

정상에 서는 것만 성공일까요

“싸우지 않으면 행복하다는 사실 어린아이도 알지만 잊고 살죠”

호랑 애벌레 = 네. 얼마 전까지 저는 한 가지 목표를 위해 전부를 걸었거든요. 제대로 쉬지도 먹지도 못하고 열심히 살았어요. 열정적이었죠. 하루하루 목표를 이루는 데 최선을 다하니, 정말 잘 산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근데 의문이 생겼어요. 정말 정상에 오르는 것만이 성공일까요? 그곳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김 박사 = 목표지향적인 삶을 살아왔군요. 목표가 명확하면 오히려 삶은 단순해지면서 편안해지죠. 한쪽만 보면 되니까요. 그런데 그 끝에는 무엇이 있는지 모르죠. 참 곤란한 경우지만, 적지 않은 사람들이 같은 고민을 합니다.

호랑 애벌레 = 적지 않다고요? 저 같은 고민을 하는 사람이 많은 줄은 몰랐네요.

김 박사 = 네.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는 고등학생들은 좋은 대학만 가면 성공한 인생을 살 것이라고 믿죠. 하지만 대학은 어찌 보면 시작에 불과하죠. 또 좋은 직장에 취직하기 위해 스펙을 쌓는 데 청춘을 바쳐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좋은 직장에 취직하면 정년이 보장되고 노후에 삶이 보장되나요? 그렇지 않지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별다른 의문을 품지 않고 모두들 한 길만 따라가요. 오히려 의문을 품으면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기도 하지요.

호랑 애벌레 = 그렇다면 저만의 문제가 아니고 사회의 문제인 거네요. 제가 느끼는 고통을 감안하니 무섭기까지 한 현상이네요. 박사님, 사실 더 큰 문제가 있습니다. 제가 한 곳만 보고 올라갔다고 했잖아요. 경쟁의 시대, 야비하지만 경쟁자를 짓밟고 올라서야 했죠. 그래야 살아남아 정상에 도달할 수 있으니까요. 열심히 동료들을 짓밟고 승승장구를 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전혀 다른 친구를 만난 거예요. 노랑 애벌레 말입니다. 그가 그러더군요. ‘정말 저 위에는 우리가 찾던 것이 있을까?’ 제 고민을 들킨 것 같아 놀라웠지만, 한편으로는 나와 같은 생각을 갖고 있어서 안심이 되기도 했어요.

김 박사 = 그럼 노랑 애벌레 또한 짓밟고 올라갔나요?

호랑 애벌레 = 부끄럽지만, 처음엔 그러려고 했어요. 하지만 그럴 수 없더군요. 그녀는 다른 애벌레들과는 달랐어요. 잠시 경쟁을 포기하고 삶을 즐길 줄 알았죠. 우린 마음 편하게 행복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김 박사 = 큰 깨달음을 얻었네요. 사실 경쟁을 그만두기 어려운 이유가 비단 경쟁에서 뒤처지기 싫다는 집착 때문만은 아니에요. 다른 사람들과 싸우지 않고 살면 얼마나 즐거운지를 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주 어린 아이들조차 아는 거잖아요. 싸우지 않으면 행복하다는 사실 말이에요.

호랑 애벌레 = 박사님 말씀이 옳아요. 그런데 또 갈등이 시작됐습니다. 기둥을 오를 때는 미래에 대한 희망을 품고 있었잖아요. 그래서 경쟁의 고통을 견딜 수 있었죠. 그런데 방향을 틀고나서는 몹시 불안했습니다. 이 끝은 어디일까. 마치 목적지를 모르고 길을 걷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엄습하는 거예요. 더욱 저를 괴롭힌 생각은 다른 애벌레들과 내가 다르다는 것이었어요. 주변 친구들, 동료들 모두가 정상을 향해 오르고 있는데, 저만 낙오자 같더란 말이죠. 낙오는 결국 패배라는 생각에 이르자 도저히 불안감을 이길 수 없었어요. 그래서 기둥 오르기를 다시 시작했어요.

김 박사 = 그럼 노랑 애벌레도 함께 갔나요?

호랑 애벌레 = 아니요. 그가 그러더군요. “무턱대고 행동하기보다는 미심쩍은 채로 그냥 기다리는 편이 더 낫다”고. 지금 생각하니 참 현명한 친구였어요. 때로 선택의 기준은 논리가 아니라 직관일 수도 있나 봅니다.

[김진세 박사의 K상담실]열심히 동료를 짓밟고 정상에 올라보니 아무것도 없어 허탈해요

남들과 다르게 살면 불안해요

“다른 것이 틀린 것이라는 무의식 우리 사회가 극복해야 할 문제죠”

김 박사 = 타인과 다르게 산다는 게 절대 쉬운 일은 아니죠. 내 삶은 내가 결정해야 한다는 명제를 너무 잘 알고 있으면서도, 우리는 남과 다르게 사는 것에 대한 거부감을 느낍니다.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이 그런 성향이 강합니다. 생존을 위협하는 외부 세력의 침입에 맞서려면 단일화가 필요하기 때문이었을 거라는 분석도 있긴 합니다. 힘을 합쳐 싸우기 위해 똘똘 뭉치는데 튀면 좋지 않으니까요. 그래서인지 남과 다른 것은 곧 틀린 것이라는 집단무의식이 있는 듯해요.

호랑 애벌레 = 맞아요. 저도 정상에 무엇이 있는지, 정상에 오르면 무엇이 좋은지도 모른 채 주변 사람들에 휩쓸려 무턱대고 따라갔잖아요. 그렇게 살면 덜 불안하거든요. 사실은 제가 약해서, 아니 우리 애벌레 모두가 두려움에 약해서겠지요.

김 박사 = 그 불안을 이겨내는 것이 개개인은 물론이고 우리 사회가 극복해야 할 문제입니다. 노랑 애벌레의 직관적 판단은 참으로 놀랍네요. 주변에 소위 ‘촉이 좋다’고 불리는 사람들이 있지요. 뇌과학적으로 보자면, 직관은 다른 사람들이 수용할 수 없는 정보를 나름의 방법으로 풀어간 결과라고 합니다. 남들이 지각할 수 없는 감각과 남과는 다른 사고의 흐름을 갖고 있어서 논리적인 판단과는 다른 결과에 도달한다는 것이죠. 아쉽게도 직관적인 사람들은 스스로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해내는지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 비논리적이라는 이유로 배척당하기도 합니다. 남과 다른 지각과 사고를 갖고 있다고 무조건 특출한 것은 아니니까요.

호랑 애벌레 = 좀 어렵네요. 느낌으로 선택하는 것이 때로 맞을 때도 있지만, 그게 늘 올바르지만은 않다는 뜻이죠? 어떻게 하면 직관적 판단과 논리적 판단의 간극을 메울 수 있을까요?

김 박사 = 좋은 질문이에요. 이렇게 하면 어떨까요? 보다 더 논리적인 사람이라면 자신의 느낌에 좀 더 충실해보고, 직관적인 사람이라면 판단을 내리기 전에 객관적 증거를 찾아보는 것이지요. 그래서 다시 시작한 기둥 오르기는 어땠나요?

호랑 애벌레 = 참 바보 같은 짓이었어요. 다시 죽을 둥 살 둥 올라간 곳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똑같이 생긴 수천개의 기둥만 내려다보일 뿐이었어요. 속았다는 생각이 들면서, 분노가 치밀었어요. 여태껏 쏟은 시간과 노력이 물거품이 됐으니까요. 엄청난 허탈감이 몰려왔어요. 차라리 죽고 싶었어요.

김 박사 = 옳다고 믿고 최선을 다한 삶이 실은 헛수고였다니, 많이 힘들었겠어요. 엄청난 상실감이 따를 거예요. 실제로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 내담자 중에 좋은 대학, 좋은 직장에 다니지만 자신은 껍데기뿐인 인간이라고 자책하는 분들이 적지 않아요. 그분들은 한결같이 말합니다. ‘한 번도 내가 걸어왔던 삶의 행로에 대해 의심을 품은 적이 없었다’고. 확실한 증거도 없이 말이죠. 하지만 어쩌겠어요. 부모도, 학교도, 직장이나 사회에서도, 자신의 삶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할 시간을 충분히 준 적이 없잖아요.

늦게라도 다시 기회가 올까요

“진정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 알면 어떻게 살 것인지 답을 찾게 돼”

호랑 애벌레 = 제게 다시 기회가 있을까요?

김 박사 = 그럼요. 늦게라도 진지하게 인생과 자아실현에 대해 고민을 해본다면, 지금과는 다른 삶을 살 수 있어요.

호랑 애벌레 = 정말 그럴 수 있을까요? 갑자기 멍해지네요. 제가 진정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선택을 잘하는 애벌레가 되고 싶어서 상담을 왔는데, 얘기를 나누다보니 저는 제가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조차 모르고 살았네요.

김 박사 = 상담을 통한 발전이 있네요. 상담은 해답을 주는 행위가 아니거든요. TV에서 보는 상담 장면에서는 ‘이렇게 해보라, 아니면 저렇게 해보라’는 답이 제시되잖아요. 물론 예능프로그램이니까 재미로 그러겠지만, 진정한 의미의 상담은 아니죠. 그렇게 답을 주는 것은 ‘조언’이죠. 조언은 고민을 듣고 해결하고자 하는 사람의 머릿속에서 나옵니다. 하지만 심리적인 변화를 목적으로 하는 상담은, 물론 조언을 하기도 하지만, 스스로 해결하도록 돕는 것이 주목적이에요. 답은 주지 않아요. 같이 고민하고 해결하려고 애쓰지요. 그런 측면에서 자신의 고민에 대해 의문을 갖게 되었다는 것은 좋은 진전이에요.

호랑 애벌레 =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힘이 나네요. 이제부터라도 내가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 집중해봐야겠어요. 구체적으로 어떤 삶을 원하는지 알고 난 후에, 어떻게 살 것인지 선택을 해야겠어요. 그렇게 되도록 도와주실 거죠?

김 박사 = 그럼요. 그게 제가 원하고 선택한 삶인걸요.

▶필자 김진세

[김진세 박사의 K상담실]열심히 동료를 짓밟고 정상에 올라보니 아무것도 없어 허탈해요

정신과 전문의 김진세 박사는 슬럼프 극복을 위해 떠난 산티아고 순례길에서도 ‘길 위의 카운슬러’로 나섰던 천생 상담가다. 고려제일정신과의원 원장으로 20년 이상 진료실에서 상담을 하고, 정신 건강과 관련된 수백편의 글을 써왔다. 저서로 <심리학 초콜릿> <행복을 인터뷰하다> <태도의 힘> <길은 모두에게 다른 말을 건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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