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고용 유지와 자사주 매입·배당 금지 조건 충족해야 기업 대출
국내 기업에 무차별 지원 땐 ‘도덕적 해이’ 우려…차단 장치 필요
긴급 진행 앞서 ‘조건 이행’ 보장돼야 경영진 일탈·혈세 낭비 막아
코로나19 확산에 따른 경기침체를 극복하기 위해 정부 지원의 신속한 집행을 주문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정부가 금융기관을 통해 100조원 규모의 긴급자금 공급에 나섰음에도 기업들의 체감도는 나아질 조짐이 안 보이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미국의 사례처럼 정부는 신용보증을, 중앙은행은 필요한 곳에 제때 지원하는 방식으로 협업이 이뤄져야 실효성을 높일 수 있다고 강조하고 있다. 다만 속도만 앞세운 무분별한 지원은 경영진의 도덕적 해이를 부추기고 국민 혈세만 낭비할 수 있다는 점에서 고용 유지와 자사주 매입 금지 등 지원 요건을 강화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12일 한국은행과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 등에 따르면 경총은 이날 코로나19 피해가 큰 15개 단체 의견을 모아 공통 건의사항 8개, 업종별 핵심 건의사항 19개를 발표했다. 이들 기업은 매출은 저조한데 사업장 유지를 위한 고정비와 고용 유지를 위한 인건비는 예년 수준이라고 하소연했다. 특히 전 세계적으로 여객 수요가 감소한 항공업 등 기간산업에 대한 지원 요구가 커지고 있다고 전했다.
이에 한은과 기획재정부 등의 역할론이 부각되고 있지만 관련 논의는 진척을 보이지 않고 있다. 한은은 그간 정부의 회사채 지급보증을 통한 유동성 공급 방안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밝혀왔다. 이주열 한은 총재는 지난 9일“비은행 금융기관에 대한 특별대출은 한계와 제약이 있다”며 “미국 연방준비제도(연준)처럼 정부의 신용 보강을 통해 시장 안정에 대처하는 게 더욱 효과적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민간 경제연구소 한 관계자는 “민간 금융기관 입장에서는 동반 부실화에 대한 우려 때문에 자금난을 겪고 있는 기업을 지원하는 데 한계가 있다”며 “정부와 한은이 나설 수 있다는 확신을 시장에 심어줘야 한다”고 말했다. 기재부는 정부의 회사채 및 기업어음(CP) 지급보증 방안에 대해 “아직 구체적으로 논의하고 있지 않다”고 선을 그었다.
어려움을 겪고 있는 기업에 대한 구체적인 지원 기준 논의도 지지부진한 상태다. 지원을 하더라도 어디에 얼마나 지원해야 하는지 명확한 기준이 없기 때문에 경영진의 도덕적 해이를 막을 수 있는 장치를 만들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반면 최대 2조3000억달러(약 2800조원)의 유동성을 투입하기로 한 미 연준의 긴급대출제도 중 대부분은 미 재무부의 ‘손실 보전’을 통해 운영되고 있다. 연준의 유동성 대책 중 투자등급에서 투기등급으로 하락한 기업의 회사채를 매입하겠다는 계획도 재무부의 보증을 통해 가능했다. 연준은 손실 위험이 없는 미 국채 등만 매입할 수 있었지만, 재무부가 이러한 부담을 떠안으면서 지원 범위를 확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황세운 자본시장연구원 연구위원은 “최근 연준이 발표한 대책들은 2008년 금융위기 당시의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 대부분”이라며 “국내 회사채와 기업어음 시장이 안정화됐지만 위기가 또 발생할 수 있는 만큼 기재부와 한은의 협업체제 구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연준은 또 고용 유지와 자사주 매입·배당 금지 등 지원 조건을 제시했다. 국민의 세금으로 지원을 받으면서 인력을 감축하거나 자사주를 매입해 지배력을 공고히 하는 일탈을 막겠다는 것이다. 금융위기 당시 연준도 대형 금융기관을 지원하면서 부실 은폐 의혹에 시달리자 엄격한 기준을 마련하게 됐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했다. 김상봉 한성대 교수는 “코로나19로 경영난을 겪는 기업에 대해서는 지원이 필요하지만 그동안 방만하게 운영해온 부실기업까지 지원하는 실수를 범해서는 안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