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5 총선을 앞두고 젊은 페미니스트 후보들을 향한 선거방해 행위가 잇따르고 있다. 후보들은 선거방해 행위를 ‘여성혐오 범죄’로 규정하고 경찰의 철저한 수사를 촉구했다.
그래픽 | 이아름 areumlee@khan.kr
서울 서대문경찰서와 신지예 무소속 국회의원 후보(30·서울 서대문갑)에 따르면, 지난 12일 낮 12시50분쯤 서울 서대문구 북아현동에 붙어있던 신 후보 선거벽보가 라이터 등 도구로 훼손된 채 발견됐다.
공직선거법은 ‘정당한 사유 없이 선거 벽보·현수막 설치를 방해, 훼손, 철거한 자’는 2년 이하 징역 또는 400만원 이하 벌금에 처한다고 규정한다. 서대문경찰서는 벽보가 훼손됐다는 주민 신고를 접수하고 인근 블랙박스 영상을 확보하며 용의자를 추적 중이다.
신 후보는 이날 아현역 인근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이 사건은 여성의 안전을 위협하겠다는 협박이자 페미니즘을 외치는 여성의 목소리를 탄압하는 혐오범죄”라며 “여성 후보자의 얼굴을 훼손한 선거벽보는 그 자체로 많은 여성들을 불안하게 한다. 신속한 수사와 엄격한 처벌로 엄중하게 다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제21대 총선에 출마한 신지예 무소속 후보(서대문갑)의 벽보가 지난 12일 훼손된 채 발견됐다. 신지예 후보 선거본부 제공
신 후보는 2018년 ‘페미니스트 서울시장’을 표방하며 서울시장 선거에 녹색당 후보로 나섰을 때도 20곳 이상에서 벽보가 훼손되는 피해를 입었다. 당시 경찰에 검거된 30대 남성은 “여권이 신장되면 남성 취업이 어려워질 것이라 생각했다”고 진술했다.
여성 후보의 벽보가 훼손된 사례는 또 있다. 서울 은평을에 출마한 신민주 기본소득당 후보(25)도 지난 7일 벽보 훼손 피해를 입었다. 서울 은평경찰서는 이날 벽보 속 신 후보의 얼굴이 날카로운 물건으로 긁힌 것을 발견하고 수사에 착수했다. 신 후보는 페이스북에 “골목에 폐쇄회로(CC)TV도 없고 지문도 안 나왔다는 이야기를 뒤늦게 들었다. 계획적인 범행”이라고 썼다.
선거운동을 돕던 자원봉사자가 물리적 공격을 당하기도 했다. 지난 2일에는 홍대입구역 9번출구에서 이지원 여성의당 비례대표 후보(27)의 유세를 돕던 자원봉사자가 지나가는 남성이 던진 돌에 맞았다. 이 후보는 “여성이기에 겪은 폭력이자 여성의당이기에 겪은 공격”이라 사건을 규정했다. 신고를 접수한 마포경찰서는 인근 CCTV와 목격자 진술을 토대로 수사를 진행하고 있다.
지난 7일 서울 한 주택가에 붙어있던 기본소득당 정당 신민주 은평을 국회의원 후보의 선거 벽보가 훼손된 채 발견됐다. 기본소득당 제공
세 후보는 페미니스트 정체성을 전면에 내세웠다는 공통점이 있다. 신민주 후보는 ‘당신의 페미니스트 국회의원’을 슬로건으로 내세웠고, 이 후보가 소속된 여성의당은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의제 정당’을 표방하고 있다. 신지예 후보도 디지털성범죄를 비롯한 여성폭력 근절을 주요 공약으로 제시했다. 이들은 언론에 보도된 사건 외에도 유세 현장에서의 언어적·물리적 폭력에 노출되는 경우가 많다고 입을 모았다.
이 후보는 “유세 현장에서 위협을 하거나 욕을 하는 사람은 거의 매일 만난다. 특히 저녁 시간이 심한 편”이라며 “지나가는 시민들이 시비를 걸어와 경찰이 출동하는 일도 많다”고 했다. 신민주 후보도 “선거운동원 대부분이 10대에서 20대 초반의 젊은 여성들이라 무례하게 굴거나 반말을 하는 사람이 많다”고 했다.
페미니스트 후보에 대한 공격이 오히려 선거운동의 원동력이 된다는 의견도 있었다. 신민주 후보는 “페미니즘을 이야기한다는 이유로 유세 현장에서 차별이나 폭력에 노출되기도 하지만 그보다 많은 수의 사람들로부터 지지를 받는 경험도 함께 하고 있다”며 “여성혐오 범죄에는 강경하게 대응하되 여성인권에 대한 분명한 메시지를 계속해서 전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지원 여성의당 비례대표 후보(오른쪽)와 선거관리원, 자원봉사자들이 2일 서울 마포구 홍대입구역에서 거리유세를 하고 있다. 여성의당 제공
‘4B 막겠다’ ‘몰카’ ‘엄마 안심’
총선 후보들의 문제 있는 ‘여성 공약’
4·15 총선 후보자들의 여성 관련 공약 상당수가 기존 성역할과 전통적 가족 구도를 답습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여성을 출산·양육하는 존재로만 인식하거나, 육아를 여성만의 일로 여기는 공약도 있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를 통해 각 후보자의 여성 관련 공약을 살펴보니 여성에 대한 고정관념을 반영한 공약과 문구가 다수 발견됐다.
이승천 더불어민주당 후보(대구 동을)는 여성 정책 중 하나로 ‘4B 운동 지양’을 내세웠다.
4B란 ‘비연애·비섹스·비결혼·비출산’을 가리키는 말로 최근 20·30대 여성들 사이에서 퍼지는 운동이다. 여성을 결혼 혹은 출산하는 대상으로만 여기는 가부장제를 벗어나 좀 더 다양한 형태의 가족 및 관계로 확장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승천 후보의 공약이 알려지자 온라인을 중심으로 비판이 일었다. 가부장제 철폐, 다양화하는 가족형태에 대한 진전된 고민 없이 기존 ‘정상가족’ 구도를 답습하는 공약이라는 지적도 나왔다. 김영순 한국여성단체연합 대표는 “주거 불안정, 디지털성폭력 등 20대 여성이 처한 현실을 위한 대안 모색 없이 일단 ‘4B 운동’을 막자니 실소를 금할 수 없다”며 “여성은 가정을 돌보고 남성은 생계를 부양한다는 이분법적 구도에서 나온 공약”이라고 했다.
여성 공약은 대부분 돌봄시설이나 육아휴직 확대 등 보육·교육에 치우쳤다. 아이가 없는 여성을 위한 공약으로는 난임시술 비용 지원 등 출산 장려책이 주를 이뤘다. 비혼 여성을 위한 공약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육아를 여성의 일로만 여기는 등 구태의연한 인식이 담긴 문구도 있었다. 무소속 김관영 후보(전북 군산)는 육아와 병행 가능한 시간선택형 일자리 구축 공약을 내걸며 ‘일자리부터 육아까지 여성이 잡(Job)는다’는 표현을 썼다. 여성을 육아 주체로 보고 남성 역할은 배제하는 인식이 반영된 것이다. 이 밖에 다른 후보들의 공보물에서도 ‘엄마의 마음으로’, ‘맘(Mom)편한’ 같은 문구가 단골로 등장했다.
성인지 감수성이 떨어지는 표현을 사용한 후보도 있었다. 홍종기 미래통합당 후보(경기 수원정), 임미숙 민중당 후보(수원병)는 성범죄 근절을 약속하며 불법촬영 대신 ‘몰래카메라’라는 용어를 썼다. 2017년 정부는 예능 프로그램에서 유래한 ‘몰래카메라’가 범죄라는 인식을 희석시킨다며 ‘불법촬영’ 사용을 권했다.
디지털성범죄 대책을 마련하겠다는 후보도 다수 있었으나 구체적 방안 제시는 드물었다.
여성 공약을 내지 않은 후보자도 많았다. 일부 후보들은 반려동물 정책을 내세우면서도 여성 정책은 내지 않았다. 김영순 대표는 “여성을 위한 공약은 여전히 우선순위에서 밀려난다”며 “성별 임금격차, 채용 성차별 금지 등 여성이 어머니, 딸이 아닌 한 명의 경제적 주체로 살 수 있도록 하는 공약이 더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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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윤지 기자 sharpsim@khan.kr
최민지 기자 ming@khan.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