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 플로리다 플로리다시티에서 한 농부가 코로나19 확산으로 판로가 막힌 토마토를 불태우고 있다. EPA연합뉴스
영국 농가의 딸기를 수확할 루마니아 노동자는 이동제한령에 발이 묶였다. 일본에서 많이 팔리는 필리핀 바나나는 농장 폐쇄가 잇따르며 수출 예상량이 급감했다. 브라질은 최대 육류 수입국 중국으로의 수출길이 막혔다. 주요 식량인 쌀과 밀 가격도 눈에 띄게 올랐다. 코로나19로 세계 식량대란 우려가 커지고 있다. 국경이 닫히면서 농장 노동 인력이 부족해진 데다, 농·축산물의 수출·수입이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전 세계 식량 비축량은 충분하지만, 국경 폐쇄와 사재기 등으로 인한 공급난이 일어날 수 있다. 식량대란은 가난한 나라에 더 큰 피해를 입힐 것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발 묶인 농장 노동자들, 버려지는 농산물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서유럽 국가의 농가들은 4월초 부터 3개월 간 딸기와 아스파라거스 등을 수확한다. 독일 농가에선 약 30만명, 프랑스에선 약 20만명, 영국에선 7~8만명의 이주노동자가 농장 일을 도맡아왔다. 이주노동자들의 대다수는 루마니아, 불가리아 등 동유럽 국가나 모로코·튀니지 등 북아프리카 국가 출신이다. 하지만 코로나19로 국경이 막혀버린 탓에 이주노동자들의 발이 묶였고, 농가들도 발을 구르고 있다. 영국 국제문제연구소 채텀하우스의 연구원 로라 웰슬리는 지난달 26일 가디언에 “농가에서 인력 부족을 겪고 있고, 이는 식량 공급 부족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했다.
일손이 급한 유럽 국가들은 자국인들의 도움을 호소하고 있다. 디디게 기욤 프랑스 농업부 장관은 지난달 말 TV에 출연해 “프랑스 농업의 위대한 군대에 합류하라”며 실업자나 학생들에게 농촌으로 와달라고 읍소했다. 영국·독일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하지만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지난달 27일 “육체노동을 꺼리는 (서유럽 국가) 사회 분위기 탓에 노동력을 채울 수 있을지 알 수 없다”고 했다.
수출길도 막혔다. 지난 15일 블룸버그 통신에 따르면 지난해 400만t이었던 필리핀의 바나나 수출이 올해 250만t으로 감소할 것으로 예상됐다. 브라질 정부도 전전긍긍하고 있다. 브라질산 소고기와 돼지고기, 닭고기를 가장 많이 수입하는 국가는 중국인데, 최근 중국 정부가 코로나19 위기가 진정될 때까지 수출 허가를 보류하겠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세계 최대 쌀 수출국인 인도에서는 외국에 판매하려던 쌀이 항구에 묶여있는 상태다.
일부 국가는 만약을 대비해 농산물 수출량을 줄이고 있다. 세계 최대 밀 수출국 러시아는 지난달 말 모든 국물의 수출을 열흘 간 제한했다. 주요 밀 수출국인 우크라이나·카자흐스탄도 최근 밀 수출을 일시 제한했다. 미국 식량정책연구소(IFFP) 선임연구원 데이비드 라보르드는 지난 9일 워싱턴포스트에 “일부 국가들이 취한 조치들이 전 세계 시장에 미치는 영향은 미미하다”면서도 다른 국가들에 도미노효과가 나타날 수 있다고 우려했다.
■곡물가격 상승, 빈국들의 식량위기
현재 전 세계 식량 비축량은 충분하다. 유엔식량농업기구(FAO)의 ‘2020년 세계 곡물 수급 전망’을 보면 2019~2020년 세계 곡물 생산량은 27억2060만t으로 추정된다. 예상 소비량(27억2150만t)과 큰 차이가 없다. 재고량도 8억6110만t이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공급망’ 문제로 식량난이 올 수 있다고 했다. 국경 폐쇄로 농산물 수입·수출이 어려워진 데다, 각국의 식량 비축, 사재기 등이 겹쳐지면서 식량 가격이 치솟을 수 있다는 것이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도 국제 식량 가격이 급등했다. 당시 세계 각국이 “내일이 없는 것처럼 식량을 사들이면서” 가격은 점점 더 뛰었다.
미국 포린폴리시(FP)는 14일 “2008년과 달리 ‘노동 인력의 이동제한’이 특정 품목에는 치명적”이라고 지적했다. 밀, 옥수수, 콩 등 주요 작물은 대부분 기계로 수확하기 때문에 국경 폐쇄의 영향을 덜 받지만, 과일이나 채소 등의 수확은 숙련 노동자가 필요하다. 신선도를 유지해야 한다는 점에서도, 봉쇄조치에 따른 물류 차질로 해당 농가들이 받은 타격은 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실제 주요 쌀 수출국인 태국에선 업계 벤치마크인 백미 5%의 가격이 지난달 25일부터 이달 1일까지 12%나 상승했다. 7년 만에 최고치다. 국제 밀 거래 벤치마크인 시카고상품거래소의 밀 선물 가격은 최근 한달 간(3월9일~4월7일) 8.7% 이상 올랐다.
식량대란에 대한 우려가 커지자 식량 공급을 모니터링하는 빅데이터 회사가 바빠졌다. 미국 캘리포니아주에 위치한 빅데이터 전문회사인 오비털 인사이트는 코로나19 사태 이후 2~3월 인공위성을 활용해 식량 공급 상황 모니터링을 두 배로 늘렸다고 블룸버그 통신이 지난 3일 전했다. 이 업체의 주요 고객은 식량 조달업체, 금융기관, 정부 대행사들이다.
무엇보다 가난한 나라, 특히 아프리카 빈민들이 가장 큰 희생자가 될 것으로 보인다. 코로나19로 불거진 식량·농업의 위기는 인도주의 단체들에게도 영향을 미쳤고, 이들에 의존해온 빈국 빈민들의 처지는 더 어려워졌다는 것이다. 코로나19 국면 이전부터 아프리카 5억명 중 약 절반이 제대로된 식량을 얻지 못했으며, 사하라 사막 이남 아프리카에선 인구의 4분의 1이 영양실조를 겪고 있던 터였다.
전세계 각국이 이 참에 농업정책의 근본적 전환을 고려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그간 식량 마저 자유무역에 맡겨놓았지만, 이번 일을 계기로 각국이 농산물 자급률을 높이는 등의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난 1일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에 따르면 중국 후난(湖南)성 로우디(婁底)직업기술학원의 우후이 교수는 온라인에 게재한 논문을 통해 “외국으로부터의 식량 수입에 의존하게 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선 식량안보를 강화해야 한다. 도시화 정책 대신 농촌에 거주하면서 계속해서 농사를 짓도록 고무하는 정책을 채택해야 한다”고 했다.

한 외국인 노동자가 지난 17일(현지시간) 독일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 보트로프의 딸기 농장에서 일하고 있다. 독일은 코로나19 확산으로 이주노동자들의 입국이 막히자 동유럽 노동자 수천명을 긴급 공수했다. AP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