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번방은_판결을_먹고_자랐다”
텔레그램을 통해 아동·청소년 성착취물을 제작·유포한 n번방 사건이 사회적 논란으로 불거진 뒤 트위터엔 이런 해시태그가 올라왔다. 분노한 시민들은 n번방의 시발점으로 ‘법원’을 가리켰다. 법원이 성착취물의 해악을 인식하지 못하고 지나치게 낮은 형량을 매겨 범죄의 방조자 역할을 했다는 비판이었다.
폭력 피해 당사자이면서 피해자와 연대하는 익명의 활동가 마녀. 그는 피해자 64명을 설문조사했다. 10대부터 50대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여성 피해자들은 가족·친구·직장상사·선생님·연인 관계의 남성에게 피해를 당했다. 반면 살고 싶어서, 또 다른 피해가 생기는 것을 막기 위해서 가해자를 신고·고소한 피해자들은 정작 수사·재판 과정에서 배제되고 있었다. 낮은 형량은 수사·재판 과정에서 피해자 목소리가 빠진 결과물이었다.
이들이 쏟아낸 말들엔 한국 사회가 성폭력 피해자를 얼마나 방치해왔는지 고스란히 드러난다. 곳곳에서 울분과 한숨이 묻어난다.
일러스트 | 이아름 areumlee@khan.kr
📌 “전 10년을 도둑맞았습니다. 고소하고 싶어도 안된다고 해서 저처럼 포기했던 피해자들이 있었을 겁니다. (…) 저같이 여러 이유로 뒤늦게 법원에 오는 피해자들을 감싸 안아주세요. 가해자를 제대로 처벌해 주세요. 저도 앞길이 창창한 사람입니다. 가해자의 사정이나 상황을 배려하는 것만큼이라도 피해자의 삶도 생각해 주세요.” (아청법상 강간 피해자)
📌 “첫 번째 증인신문 때 정말 말을 하기가 어려웠어요. 어릴 때 당했던 성폭력 이후 주눅이 들고 정신과 약을 계속 먹다보니 말이 꼬이고 이상해졌어요. 피해를 안 당해서가 아니라 말하는 방법을 모르거나 그 피해로 인해서 안에서 망가졌어요. 피해자가 어떤 고통 속에서 살아왔는지 헤아려 주세요. (…) 그 피해자들의 부족한 말을 의심하지 말고 들어주세요. (아청법상 강간미수 피해자)
📌 “피해자는 법을 잘 모릅니다. 판사님들 기준에 맞추라고만 하지 말고 제발 평범한 사람들 입장에서 생각해 주세요. 제가 후배들이나 제자들에게 성폭력 피해를 당했을 때 ‘법대로’ 하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게 좋은 판결을 부탁합니다. 제가 후회하지 않게 해주세요.” (문화예술계 내 성폭력·강제추행 피해자)
📌 “디지털 성폭력은 경찰들도 모르고 재판으로 간다고 해도 처벌이 약해서 가해자들이 더 날뛴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디지털 성폭력 피해를 입으면 진짜 회복이 불가능할 정도가 됩니다. 성관계 동영상이 아니어도 그래요. 전 합성이 된 것이었지만 지금도 돌아다니는 그 사진만 생각해도 죽고 싶습니다. 이런 마음과 디지털 성범죄의 영향력을 생각해서 강하게 처벌해 주세요.” (디지털 성폭력-합성)
📌 “성폭력 피해의 원인을 여전히 피해자에게서 찾는다. 그래서 너무 고통스럽다. 제발 그러지 말았으면 좋겠다. 나는 그냥 클럽에서 재미있게 놀려고 갔다가 성폭력 피해를 당했다. 피해자가 완전해야만 피해자로 인정받는 것일까. 피해를 입은 그 사실만 봐줬으면 좋겠다. 나도 사람이라 완전하지 않은데, 한국에서 성폭력 피해자는 그 어떤 흠도 없어야 인정받는 것 같다.” (미고소 피해자)
📌 “중년 여성은 성적 수치심을 느끼지 않을 것이라는 판결 기사를 읽었습니다. 제가 피해자로 그 판결문을 받았다면 삶에 대한 희망을 버렸을 겁니다. 그래도 재판하는 피해자들이 부럽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내 딸이 피해를 입으면 어떨지 무서워졌습니다. 그랬더니 딸은 싸울 테니 편들어 달라고 합니다. 그렇게 하기로 했습니다. 내가 응원할 가치가 있는 법원을 만들어 주십시오.” (직장 내 성폭력·강간 피해자)
📌 “두서없이 흥분해도, 과하게 반응해도, 그게 모두 피해를 입은 사람의 모습이라 생각하고 이해해주세요. 재판정 밖에서도 계속 공격당하고 의심받는 피해자의 삶을 생각해주십시오. 저도 이런 제 모습이 낯설고 두렵고 싫습니다. 피해를 인정받은 후에야 다시 자신의 모습을 찾을 수 있어요.” (직장 내 성폭력 피해자)
📌 “성폭력 피해자에 대해 공부를 하고 재판을 했으면 좋겠다. 피해자는 법원 밖에서 사람들과 부대끼며 살아가는 입체적인 존재다. 성폭력 피해가 피해자의 삶을 어떻게 바꾸는지 (법원이) 더 많이 공부하고 이해해야 한다.” (직장 내 성폭력 피해자)
📌 “멈췄던 그 시간을 다시 돌릴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이제 저는 유사한 피해에 더 이상 침묵하지 않고 싸울 각오가 돼 있습니다. 그러니 판사님들도 판결로써 피해자들에게 힘이 되어주십시오. 판결이 한 사람의 삶을 바꿉니다. 취직도 다시 하고 미래를 생각하며 꿈을 꿉니다. 이건 가해자를 제대로 처벌해서 생긴 힘 때문입니다.” (직장 내 성폭력 피해자)
📌 “수사과정에서 많은 것을 정확하게 기억해내지 못했습니다. 잊고 싶어서 악을 쓰고 노력하다보니 진짜 많은 것을 잊어버렸던 겁니다. (…) 누구보다도 제가 제 탓을 많이 했습니다. 그러니 제발 피해자들에게 책임을 넘기지 말아주십시오.” (대학 내 성폭력 피해자)
📌 “정보를 모으고 대비를 해도 여전히 고소하고 재판받는 건 두렵고 무섭다. 무엇보다 나를 안 믿어 줄까 봐, 내가 거짓말하고 있다고 할까 봐 무섭다. 그런데 가해자가 처벌받는 걸 봐야 살 것 같다. 늦게라도 고소하는 이유는 살고 싶어서, 꿈을 꾸고 싶어서라는 것을 판사들이 알았으면 한다.” (강제추행 피해자)
📌 “연달아 성폭력 피해를 입는 것이 상식적이냐고 질문하는 판사를 방청연대 하러 갔다가 봤습니다. 그래서 여전히 고소를 망설입니다. 그렇지만 피해자의 신뢰를 악용해 또다시 성착취나 성폭행을 하는 인간도 많습니다. 제가 고소하고 수사와 재판을 거치게 되면 이런 질문과 의심에 놓이게 되겠지만 그래도 이게 현실임을 알리고 싶습니다.” (대학 내 성폭력 피해자)
📌 “바로 신고했는데도 전 수사과정이 너무 힘들었고 기억도 뒤죽박죽이었습니다. (…) 없던 피해를 만들어내는 ‘꽃뱀·무고녀’는 현실에선 찾기 어렵습니다. 법적으로 피해를 인정받지 못해도 피해자가 아닌 것은 아니지만, 제발 더 많은 피해자들이 성폭력 피해를 법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판결을 내려주십시오.” (직장 내 성폭력 피해자)
※기사에 인용한 피해자들의 말은 대면조사를 한 경우에 해당하며, 인용과 관련해 피해자들에게 사전 허락을 받았습니다.
#N번방은_판결을_먹고_자랐다
— 플랫 (@flatflat38) April 20, 2020
분노한 시민들은 n번방의 시발점으로 ‘법원’을 가리켰다. 법원이 성착취물의 해악을 인식하지 못하고 지나치게 낮은 형량을 매겨 범죄의 방조자 역할을 했다는 비판이었다.https://t.co/VjZGLJqTO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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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혜리 기자 lhr@khan.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