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예나 “누군가 지켜봤기 때문에 바뀌었고, 앞으로도 바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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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예나 “누군가 지켜봤기 때문에 바뀌었고, 앞으로도 바뀔 것이다.”[플랫]

하예나 “누군가 지켜봤기 때문에 바뀌었고, 앞으로도 바뀔 것이다.”

여성들은 늘 싸웠다. ‘음란물’ ‘포르노’로 불리며 여성의 몸이 오락거리로 소비될 때 “음란물, 포르노가 아니라 ‘디지털 성범죄’”라고 외쳤다. 소라넷, 웹하드카르텔, 랜덤채팅, 트위터·페이스북 등 온라인 구석구석에서 일어나는 디지털 성범죄를 실시간 모니터링하고 경찰에 신고했다. 텔레그램 성착취 사건이 공론화되기 전부터 “이대로 두고만 볼 수 없다”며 트위터에 모여 텔레그램 방을 신고했다. 여성들의 끈질긴 투쟁으로 한때 국내 최대 디지털 성범죄 사이트 ‘소라넷’이 폐쇄됐고, 텔레그램 성착취 사건에 대한 수사가 시작됐다. 디지털 성범죄 사태마다 앞장서 싸워온 여성들은 “텔레그램에서 벌어진 성착취는 새로운 일이 아니며, 과거 아무도 처벌받지 않아 생긴 결과”라고 입을 모았다. 디지털 성범죄 가해자들이 잡혀간다는 점에서는 “이 싸움에서 이기고 있고, 이기고야 말 것”이라고 했다. 이들의 이야기를 연재한다.



2016년 4월7일 회원 100만명이 넘는 소라넷이 폐쇄됐다. 소라넷은 그해 6월6일 트위터 계정을 통해 운영 종료를 선언했다. 1999년 6월 ‘소라의 가이드’라는 이름으로 운영되기 시작한 지 17년 만이다.

끈질기게 단속을 피했던 소라넷의 폐쇄를 이끈 건 경찰도, 언론도 아닌 하예나 전 DSO(디지털성범죄아웃) 대표가 2015년 10월 만든 ‘소라넷고발프로젝트’라는 작은 단체였다. 이 단체는 초대남(공범)을 모집해 술 취한 여성을 대상으로 강간 모의를 하는 정보 창구 역할을 했던 소라넷을 실시간 모니터링하고 수사당국에 고발했다. 활동가들이 ‘번아웃’되며 2016년부터 이어온 DSO는 지난해 12월 해산했다.

하예나 “누군가 지켜봤기 때문에 바뀌었고, 앞으로도 바뀔 것이다.”[플랫]

지난 9일 서울 송파구 한 카페에서 하 전 대표를 만났다. 하 전 대표는 “n번방 이전에도 인터넷에선 지속적으로 성착취가 벌어졌다”고 말했다. 2017년 초 영상 랜덤채팅 사이트에서는 ‘몸캠 찍은 너 누군지 안다’ ‘내 성노예 해라’라고 협박하는 가해자들이 있었다. 피해자들은 DSO에 지원을 요청했다. 트위터에서 검색하면 성착취 피해 영상 모음집을 3만~4만원에 파는 계정이 수두룩했다. 아동·청소년 성착취물, 불법촬영물에 지인 얼굴을 합성해준다는 지인 능욕 계정도 있었다.

“여러 플랫폼에서 성착취 영상을 제작·유포·판매했던 가해자들이 텔레그램이라는 하나의 채널에 모여 있을 뿐, 전혀 새로운 범죄가 아닙니다.”

수사기관의 단속으로 디지털 성범죄를 벌이던 공개 인터넷 커뮤니티가 위축되자 가해자들은 텔레그램, 디스코드, 위커 등 보안이 강한 해외 사회관계망서비스(SNS)로 옮겨갔다. 하 전 대표는 “가해자들은 복잡한 ‘인증 과정’을 거쳐야 음지화된 디지털 성범죄 채널에 들어갈 수 있었다. 이는 역으로 법적 처벌을 받을 수 있는 환경이 됐다”고 했다.

‘잘못 들어갔다’ ‘모르고 봤다’며 처벌을 피했던 수법이 통하지 않게 된 것이다.

복잡한 인증 절차, 성착취물을 구매하는 과정에 남은 가상통화 흔적 같은 단서들로 인해 가해 집단이 드러났다. 지난 16일 기준 디지털 성범죄와 관련해 309명이 검거되고, 박사방 운영자 조주빈(25)을 비롯한 43명이 구속됐다.

하 전 대표는 여성의 몸을 ‘음란물’로 소비하는 문화가 디지털 성범죄를 반복하게 한다고 지적했다. 가정용 디지털 캠코더와 인터넷이 보급되기 시작한 1990년대에도 ‘빨간 마후라 사건’ 등 디지털 성범죄는 있었다. 다만 ‘성범죄’가 아니라 ‘○○○ 비디오’로 불렸다. 영상에 등장한 피해자들은 단 한 번도 ‘피해자’로 보호받지 못했다.

“당시 아무도 범죄, 여성학대라고 생각하지 않고 ‘문란한 스캔들’로 치부해 문제가 이어졌습니다. 디지털 성범죄가 ‘폭력’으로 조명받지 못한 이유를 생각해봐야 합니다.”


성폭력 피해자이기도 한 하 전 대표는 텔레그램 성착취 사건 피해자들에게 ‘앞으로의 삶’을 이야기해야 한다고 했다. DSO에서도 불법촬영 피해자들과 피해 경험을 이야기하는 ‘이름 없는 모임’을 진행했다. 그는 “사회에서는 피해자들을 수동적이고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이미지로 그려내지만, 피해자들도 어떻게든 살아나가야 한다”며 “삶을 회복하고 지속하는 이야기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성착취로 명명되는 걸 보면서 ‘그동안 많은 여성들이 싸워왔구나’ 생각했어요.”

하 전 대표가 5년 전 소라넷을 고발할 때만 해도 ‘음란물’ ‘포르노’라는 말이 통용됐다. 그는 텔레그램 사건에 대한 관심을 놓지 않아야 세상이 바뀐다고 했다.

“지켜보는 건 정말 고통스럽고 힘들어요. ‘관심을 가져서 바뀌겠냐’면서 습관적인 무기력함에 빠져 있기도 했죠. 하지만 누군가 지켜봤기 때문에 바뀌었고, 앞으로도 바뀔 거예요.”


탁지영 기자 g0g0@kha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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