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번방은_판결을_먹고_자랐다”에 이어 “#누구를_위한_1년인가”라는 트위터 해시태그가 나왔다. 텔레그램을 통해 아동·청소년 성착취물을 유포한 혐의 등으로 기소된 ‘켈리’(활동명)에게 징역 1년이 확정되면서다. 아동·청소년 성착취물 관련 범죄의 형량을 높여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은 이때, 법원은 어떤 분위기일까.
대법원 양형위원회는 지난 20일 회의 때 아동·청소년 음란물 범죄 관련 양형기준을 논의한 자료를 최근 홈페이지에 올렸다. 자료엔 기존의 법원 판결 분석과 판사 대상 설문조사 결과, 양형위 전문위원들의 의견이 담겨있다. 판사 대상 설문조사는 조사 기간이 지난달 4일부터 13일까지로 n번방 사건이 불거지기 전이었다. 조사 결과를 보면 일선 판사들은 상당히 낮은 형량을 선고하는 게 적절하다고 답변했다. 전문위원들은 일반적으로 가중했을 때 성착취물 제작 범죄에 징역 13년까지 선고하는 기준을 제시했다.
지난 6일 더불어민주당 선거유세가 벌어지고 있는 경기 파주시 금릉역 앞 광장 건너편에서 여성단체 회원들이 n번방 가담자들의 처벌을 요구하는 1인시위를 하고있다. 이준헌 기자
■기존 판결 데이터 부족
범죄를 저지른 사람에게 선고할 수 있다고 법에 명시된 형량을 ‘법정형’이라고 한다. 구체적인 사건을 심리하는 판사는 법정형 내에서 가중 또는 감경요소를 반영해 피고인의 ‘선고형’을 정한다. 양형기준은 기본 영역과 가중·감경요소를 반영했을 때의 영역 범위, 판사가 적용할 수 있는 가중·감경요소를 정해놓는 것이다.
n번방 관련 사건들에 적용되는 법 조항은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아청법) 제11조다. 이 조항은 아동·청소년 이용 음란물을 제작한 사람에게 ‘무기징역 또는 5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할 수 있다고 규정한다. 영리 목적 판매는 ‘10년 이하의 징역’이고, 배포는 ‘7년 이하의 징역 또는 5000만원 이하의 벌금’이다.
양형위는 양형기준을 만들 때 통상 기존의 법원 판결 데이터를 주요한 참고자료로 삼는다. 이번에도 판결 분석을 했지만, 아동·청소년 음란물 범죄는 실형이 선고된 판결의 수가 워낙 적었다.
양형위 조사 결과 2014년부터 2018년까지 5년간 제작 범죄 하나로 기소된 사건은 15건에 불과했다. 이 중 실형은 3건, 집행유예는 12건이다. 평균 형량은 30.4월(약 2년6월)이었다. 이는 제작 범죄 법정형의 하한인 징역 5년에서 판사 재량으로 감형해주는 ‘작량감경’을 통해 절반으로 깎아준 것이다. 즉 판사가 선고할 수 있는 가장 낮은 형량이다. 피해자의 처벌불원(처벌을 원하지 않는다는 의사 표시)과 성착취물 제작 과정에서 피고인이 유형력을 행사하지 않은 점을 피고인에 유리한 사정으로 반영한 것으로 나타났다.
영리 목적 판매 범죄는 31건 중 3건이 실형, 28건이 집행유예였다. 평균 형량은 6.9월이었는데 이는 청소년의 성적 행위를 인터넷으로 실시간 방송한 피고인에게 징역 3년을 선고한 1건 때문에 높아진 수치다. 배포 범죄만으로 기소된 사건은 4건 뿐이었는데 모두 집행유예였다.
■법관들은 낮은 형량 답변
판사 대상 설문조사에는 전국 법원의 판사 3000여명 중 5분의1 수준인 660여명이 참여했다.
출처: 대법원 양형위원회 전문위원 업무보고 자료
제작 범죄에 대해서는 응답자의 31.6%(211명)가 기본 영역으로 ‘징역 3년’을 선택했다. 23.7%가 징역 5년, 14.8%가 징역 2년6월을 선택했다. 징역 6·7·8·9년 이상을 선택한 판사는 모두 합쳐 7.3%(50명)에 그쳤다. 아동·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강간죄의 양형기준 기본 영역이 13세 이상 피해자의 경우 징역 5~8년, 13세 미만 피해자의 경우 징역 8~12년인 것과 비교해보면 설문조사 결과의 형량 수위가 낮은 편이다.
가중 영역으로는 ‘징역 5년’(37.9%)을 꼽은 판사가 가장 많았다. 법정형은 무기징역까지 선고할 수 있다고 규정돼있지만 신뢰관계를 이용하거나, 동종 전과가 있는 경우 등의 가중요소를 반영하더라도 징역 5년이 적당하다고 판사들은 본 것이다. 그 다음으로는 ‘징역 7년’(19.8%), ‘징역 4년 이하’(14.1%) 순이었다. 감경 영역으로는 절반이 넘는 57.9%의 판사가 ‘징역 2년6월’을 선택했다. 징역 3년 이하는 집행유예를 선고할 수 있다.
영리 목적 판매 범죄는 기본 영역으로 ‘징역 3년 이상’이 33.4%로 가장 많았는데, 이 문항은 애초에 보기 중 가장 높은 형량이 ‘징역 3년 이상’이어서 보기가 잘못 설정됐다는 지적이 있었다. 가중 영역도 보기 중 가장 형량이 높은 ‘징역 5년 이상’(39.3%)이 최다 답변이었다.
배포 범죄의 경우 답변이 고르게 나타났다. 기본 영역에서는 징역 1년(20.0%)이 가장 많은 답변이었다. 가중 영역에서는 ‘징역 1년6월’(20.7%), ‘징역 2년’(20.6%) 순이었다. 이 부분에서는 ‘징역 5년 이상’이 17.4%인 점이 눈에 띈다.
서울 서초동 대법원 대법정과 법정 입구에 있는 정의의 여신상. /이상훈 선임기자
■제작 범죄 상한 징역 13년 검토
전문위원들은 이 같은 자료들을 검토한 결과 제작 범죄의 경우 가중 영역의 상한을 징역 13년으로 하는 데 의견이 일치했다. 이게 판사가 선고할 수 있는 가장 높은 형량은 아니다. 만약 특별가중요소가 2개 이상 있을 때는 가중 영역 상한의 2분의 1을 더해 선고할 수 있다. 즉 징역 19년6월까지 선고할 수 있다. 특별가중요소는 반복적으로 범죄를 저질렀거나, 피해가 극심한 경우 등이 해당된다. 2개 범죄를 저지른 경우에는 여기에 또 2분의 1이 가중되기 때문에 형량은 더 높아진다.
가중 영역의 상한을 두고 영리 목적 판매 범죄는 징역 7년과 8년, 배포 범죄는 징역 4년과 7년 사이에서 전문위원들의 의견이 엇갈렸다. 앞서 판사 대상 설문조사에 대해 건의문을 낸 판사들은 “디지털 성범죄의 특성상 제작, 영리 목적 판매, 배포, 소지 단계 사이의 죄질 차이가 크다고 볼 수 없다. 제작, 영리 목적 판매, 배포, 소지 각 단계마다 새로운 가해와 피해가 발생되는 것”이라며 “판매, 배포, 소지로 인한 피해가 제작으로 완성된 범죄에 부수적으로 가볍게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했다.
처벌불원을 특별감경요소로 포함할지 여부에 대해서도 전문위원들의 의견은 엇갈렸다. 다수의견(7명)은 포함시켜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그 근거로는 다른 범죄에서도 처벌불원을 대부분 특별감경인자로 반영한다는 점, 실질적인 피해 보상 및 피해확산 방지 조치를 촉진할 수 있다는 점이 나왔다.
5명은 반대의견이었다. 아동·청소년 음란물 범죄를 처벌하는 이유는 아동·청소년의 동의 여부와 관계 없이 사회적 법익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고, 처벌불원을 감경인자로 반영하면 피해자인 아동·청소년의 미성숙한 의사판단 능력을 악용할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들었다.
최종적인 양형기준은 전문위원들의 검토 내용을 토대로 양형위원들이 확정한다. 양형위는 지난 20일 회의 후 “디지털 성범죄와 관련된 엄중한 현실을 인식하고, 기존 판결례에서 선고된 양형보다 높은 양형기준 설정이 필요하다는 데에 의견을 같이 했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