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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번방, 시민교육의 실패

입력 2020.04.29 20:35

얼굴을 드러낸 이들은 괴물이 아니었다. 너무나 평범해서 당황스럽기까지 한 10~20대 청소년들이었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텔레그램 n번방’ 성착취 사건 ‘박사방’의 주범과 공범 ‘박사’ 조주빈(24), ‘부따’ 강훈(18)이 포토라인 앞에 섰을 때, 그들의 부모와 가족, 선생님, 친구들이 문득 떠올랐다.

[경향의 눈]n번방, 시민교육의 실패

코로나19가 강타하며 학교 문이 열리지 않았던 3월과 4월, 교육의 화제는 단연 온라인개학이었다. 한편에선 먹통이 된 서버와 준비 안된 수업에 대한 우려와 비판이 쏟아졌고, 다른 한편에선 원격수업과 에듀테크가 새로운 기회가 될 것이라는 기대가 요란했다. 그런데 마치 별개의 일인 듯 동시에 진행되고 있는 n번방 사건을 보면서 모든 논란이 부질없게 느껴진다. 며칠 전만 해도 중학교 동창들인 고교 1학년 5명이 ‘박사방’과 유사한 형태로 텔레그램 성착취물을 유통하다 검거됐다. 텔레그램 주요 공범 상당수가, 인터넷 채팅 메신저 디스코드의 성범죄자 대다수가 10대로 밝혀졌다. 지금 이 순간에도 비슷한 일들이 확대·증폭되고 있을지 모른다. 이들은 어디에서 이런 일을 해도 된다고 배웠을까.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공교육 12년의 기간, 이들에게 학교는, 교육은, 사회는 대체 무엇이었을까.

n번방 사건은 교육의 실패다. ‘인간 존중의 부재’가 핵심이다. 여성을 물건처럼 취급하고 상품으로 값을 매겨 거래한 그 세계 안에 ‘인간’은 없었다. 아이들을 인격체로, 시민으로 존중한 적이 없는 우리사회에서 아이들이 타인을 함부로 대하는 건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다. 교육 실패엔 아이·어른이 따로 없다. 소위 사회지도층이라 불리는 이들의 형편없는 공감능력과 인권감수성을 우리는 공공연히, 자주 마주치지 않았나. 초등성평등연구회에서는 교육계가 n번방 사태에 강력한 대처방안을 내놔야 한다는 성명서를 냈다.

n번방 사건은 몇몇 개인의, 사이코패스와 같은 특별한 사람의 한순간 일탈이 아니다. 유료회원만 1만명에, 절대 들킬 리 없다는 생각으로 성착취물 공유방을 이용한 이들이 26만명(추산·중복 포함)에 달한다. 많은 이들이 궁극적인 해결책으로 성교육·성평등 교육을 얘기한다. 성평등 교육을 뼈대로 하되, 인권·시민교육 전반으로 넓혀야 한다. 벼락치기, 강의 몇 번의 주입식 교육으로 될 일이 아니다. 유치원 이전부터 가정과 학교에서 ‘어떤 상황에서도 타인을 배려하고 존중해야 한다’는 것을, 그렇지 못한 비열한 언행은 부끄러운 것으로 큰 대가를 치른다는 것을, 피부처럼 몸과 머리에 붙도록 반복해 가르쳐야 한다. 인권 감수성이 한참 떨어지는 교육당국과 기성세대에만 맡길 수도 없다. ‘스쿨 미투’ 이후 학생들은 학교를 떠나고 가해 교사는 돌아오는데, 사회지도층의 성범죄가 계속 이어지는데 누가 누굴 가르친단 말인가. 청소년 페미니스트 네트워크 ‘위티’의 양지혜 공동대표는 “청소년들이 주체적으로 참여하는 토론형 성교육을 통해 규칙을 함께 만들고, 공동체 문화가 존중의 문화로 바뀌어야 의미 있는 변화가 따를 것”이라고 강조했다.

청소년 성범죄는 늘 문제시됐다. 교육부는 이를 해결한다고 2015년 ‘여자는 무드에 약하고 남자는 누드에 약하다’ 식의 어처구니없는 ‘성교육표준안’을 만들어 각급 학교에 배포했다. 그해엔 국가가 법으로 인성교육을 관리하는 세계 유일의 ‘인성교육진흥법’이란 것도 시행됐다. 예, 효, 정직, 책임, 존중, 배려, 소통, 협동을 8가지 덕목으로 정했다. 혼자 살겠다고 배에서 빠져나온 세월호 이준석 선장 같은 이를 막겠다는 법으로, ‘이준석 방지법’이라는 엉뚱한 별칭이 붙었다. 잘못은 어른들이 해놓고 아이들에게 인성을 가르치겠다니 이런 코미디가 없다.

코로나19 이후의 삶은 여러모로 달라질 것이다. 교육도 예외가 아니다. 온라인교육, 에듀테크는 부차적인 문제다. 좀 더 근본적인 질문을 해야 한다. 코로나19 속에서 ‘민주주의’와 ‘투명성’이 새 화두로 떠오른 만큼, 향후 교육 목표는 세계시민을 기르는 것이어야 한다. ‘민주시민교육’은 현 정부의 핵심 국정과제이기도 하다. 쓸모없는 ‘성교육표준안’이니, ‘인성교육진흥법’ 같은 것들은 폐기하고, 시민 모두 성평등·인권감수성을 기를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을 찾길 바란다. 글로벌 스탠더드에서 한참 뒤처진 ‘K교육’도 ‘K방역’처럼 자부심을 가질 새판을 짤 기회다. 허약한 지반 위에 교과 공부(국·영·수)의 모래성을 쌓은들 무너질 수밖에 없다. 학교는 인격이 자라는 민주주의의 장이어야 한다. 아이들도, 공동체도 살리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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