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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 당했습니다

입력 2020.05.03 20:38

수정 2020.05.03 2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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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지방선거 결과를 쓰면서 노무현 전 대통령의 건배사를 소환했다. 2000년 8월 노 전 대통령이 해양수산부 장관에 취임하자 여론은 “3김 시대를 청산한다면서 왜 DJ(김대중 전 대통령) 임명장을 받았나”라고 비판했다. 고심하던 노 전 대통령은 한 지인의 말에 무릎을 쳤다. “노무현이 DJ 차세대로 성장하는 자체가 청산 아닙니까. ‘청산하는 중입니다’라고 하면 되지요.” 노 전 대통령은 밝아진 얼굴로 건배사를 외쳤다. ‘청산하는 중입니다.’ 2018년 지방선거에서 대구는 27년, 경북은 23년 만에 더불어민주당 소속 광역의원을 처음 배출했다. 박정희 신화의 자장 지역인 구미에서도 민주당 시장이 당선됐다. 당시 ‘(지역주의를) 청산하는 중입니다’라는 제목의 칼럼을 쓴 뒤 나는 소망했다. 2020년 총선을 평가할 땐 ‘완전히 청산했습니다. 축하합니다’라고 쓸 수 있기를.

21대 총선이 끝났다. 민주당 압승, 주류 교체, 보수 궤멸로 평가된다. 그러나 2년 전 기대했던 칼럼 제목을 쓰지 못한 채 머뭇거리고 있다. 대구·경북(TK) 선거 결과 때문이다.

[아침을 열며]청산 당했습니다

지역주의(영남의 경우)는 감정(DJ는 못 믿어), 정당 일체감(우리가 남이가), 이념의 내면화(빨갱이 정부는 안돼)라는 단계를 거치며 작동한다. 미래통합당은 TK에서 지역주의의 모든 자원을 끌어모아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에 대한 배타성을 드러냈다. 정당의 동원 논리로 보면 지역주의가 공고해진 게 맞다. “통합당이 앞서면 TK는 가을에 감 따면서 까치가 먹을 거 남겨놓듯 민주당 후보 한두 명쯤 당선시킨다. 까치밥 이론이지. 이번엔 달랐다. 통합당은 지역주의 공식에 코로나 색깔론까지 제공하며 지역과 정당을 일체화했다.”(김태일 영남대 교수)

지역주의를 정당에 대한 보상 심리, 시민의 이익(집권 가능성) 관점에서 볼 땐 얘기가 달라진다. TK 시민들이 통합당을 집권 가능한 정당으로 보고 투표했을까. 민주당 후보들이 대구 전체 12곳 중 11명이 20% 이상 득표한 사실은 이 가정을 뒤집는다. 또, 지역주의가 상대적 개념이라는 점에서 경쟁지인 호남의 선거 결과도 마찬가지다. 민주당이 싹쓸이했지만 호남 시민들은 시대에 뒤떨어진 여권 거물들을 모조리 끌어내렸다.

이번 총선은 도대체 뭔가. 지역주의 부활일까, 특수한 지역주의일까, 아니면 지역주의가 아닌 다른 현상일까.

경북 포항에서 25년간 민주당 후보로 6번 도전했지만 전패한 허대만 후보를 만났다. “다른 견해를 배척하는 현상은 약해졌다. 다만 TK는 권력을 자신들이 주도하지 않는 한 주류가 바뀌고 사회가 변했다는 걸 인정하지 않았다. 전 국민의 80%가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에 동의했는데도 선거 내내 ‘박근혜 대통령 풀어줘야 한다’는 말을 가장 많이 들었다. TK만 거꾸로 가는 것 같았다.” 그는 이전 과는 달리 TK의 고립을 걱정하고 있었다.

‘지역주의를 끊기 위해 몸부림쳐온 것이 내 정치역정’이라고 했던 김부겸 의원도 최근 언어가 달라졌다. “민주당이 마음에 안 들어도 나를 보고 뽑아달라”고 하더니 “대한민국 전체를 위해 이 방법이 낫지 않겠습니까라는 정공법으로 돌파해야 한다”고 했다.

전자가 TK의 눈치를 보면서 지역주의에 영합하는 것이라면, 후자는 어떤 세력이 변화를 주도하는지 평가받겠다는 정공법이라 할 수 있다. 30년 넘게 패권과 균열의 무기였던 지역주의를 가치의 문제로 극복하겠다는 각오로 이해했다.

4·15 총선이 남긴 유일한 쟁점, 지역주의. 여전히 갑론을박이 오가지만 분명 과거와는 다른 모습을 남겼다. TK를 제외하면 전국이 접전지가 됐고, 접전지 후보들의 당락 차이도 크지 않았고, 일당 독점 체제도 사라졌다. 그렇다면 한 지역만 죽어도 놓지 못하겠다고 붙들고 있는 걸 ‘(지역)주의’라고 할 순 없다. 누군가는 TK의 패거리주의라고 규정했지만 그렇게 단언하면 지역의 50대 이하 젊은 유권자들은 억울한 일이다.

전통적 의미의 지역주의는 ‘청산 당했다’. 민주당 패장들은 TK의 고립을 걱정하며, 가치 투쟁을 하겠다는 선언으로 이 의미를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통합당을 비롯한 지역 보수 세력은 청산 당한 과거를 붙들고 지금도 항전 중이다. 온갖 코로나 허위 정보로 시민들을 옭아매더니 선거가 끝나고 나선 중앙 정부가 외면하면 안된다고 하고, 대구가 코로나 방역의 세계적 모범이라고 자화자찬하고 있다. TK를 ‘청산 당한’ 낡은 지역주의로 계속 옭아매려 한다면 다음은 통합당이 ‘청산 당할’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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