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이 사람을 국회 지붕까지 올라가게 했나….’
한 50대 남성이 지난 5일 국회 의원회관 출입문 지붕에 올라갔다.
“제 이야기를 좀 들어보시라고요.” 수척한 얼굴의 그는 국회의원들에게 할 말이 많다고 했다. 남성은 “이번 주하고 다음 주 본회의가 마지막에 열릴 것 같아요. 그것만 끝나면 내려갈게요”라고 했다.
그를 본 국회 경호·경비를 담당하는 직원들은 당황해하면서도 말을 잇지 못했다. 직원들도 그의 얼굴을 익히 알고 있는 터다. 900일 넘게 국회 정문 앞에서 노숙 농성을 하고 있는 그는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 최승우씨(51)다. 그가 5일 오후 3시쯤부터 고공농성에 나선 이유는 국회가 ‘과거사법 개정안’을 이번에도 통과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형제복지원 생존 피해자 최승우 씨가 과거사법 제정을 촉구하며 6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이틀째 고공농성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형제복지원 사건이란?
형제복지원 사건은 ‘한국판 홀로코스트’ 등 최악의 인권유린 사건으로 불린다. 1975년부터 87년까지 12년간 ‘부랑아를 선도한다’는 명분으로 부산 사상구 주례동 형제복지원에서 누적 인원 3만7000명 이상을 수용, 불법감금과 강제노역, 구타, 살인·암매장이 자행됐던 사건이다. 형제복지원은 3000여명의 원생에게 구타, 성폭행, 강제노역 등을 자행하며 국가보조금을 받았다.
형제복지원이 운영된 12년 동안 공식 확인된 사망자 수만 551명이다. 1987년 3월 탈출을 시도한 원생 1명이 직원의 구타로 숨지고 35명이 집단 탈출하면서 알려졌다. 박인근 형제복지원 원장은 재판에 넘겨졌지만 1989년 7월 법원은 건축법 위반과 업무상횡령 혐의만 인정해 징역 2년6개월을 선고했다.
진실을 원하는 목소리는 끊임없이 제기됐지만 진실은 여전히 덮여있다. 2005년 탄생해 4년간 활동을 마친 후 해산된 과거사정리위원회 활동도 10년 넘게 멈춘 상태다.
지난 2018년엔 문무일 당시 검찰총장은 눈물의 사과를 하기도 했다. 문 총장은 피해자들을 직접 만나 “과거 검찰이 인권침해의 실상을 제대로 밝히지 못했다”고 고개를 숙였다. 사건이 세상에 알려진 지 31년 만의 일이었다.
하지만 ‘마지막 보루’였던 진실을 규명할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 일부개정법률안(과거사법)’은 번번히 국회 문턱을 넘지 못했다. 과거사법 개정안은 과거사위 활동을 4년간 재개하는 내용으로, 국회가 선출하는 8인, 대통령이 지명하는 4인, 대법원장이 지명하는 3인 등 모두 15명으로 위원회를 구성하도록 했다.
최씨는 지난해 11월에도 과거사법 통과를 호소하며 20일 넘게 단식한 뒤 병원에 이송됐다. 최씨를 비롯한 피해자들의 국회 앞 노수공성은 오늘로 910일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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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무일 검찰총장이 지난 2018년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이룸센터 2층 교육실에서 형제복지원 피해자들에게 사과를 하고 있다. / 권도현 기자 lightroad@kyunghyang.com
■국회는 ‘무응답’, 도대체 왜?
과거사법 개정안은 입법취지에 이렇게 적혀 있다. ‘과거와의 화해를 통해 미래로 나아가 국민통합에 기여한다’. 정치권은 이 같은 취지에 한목소리로 이견이 없다고 했다. 하지만 정치권은 결과적으로 8년째 ‘무응답’하고 있다.
19대 국회 자동폐기에 이어 20대 국회로 넘어온 과거사법 개정안은 먼저 소관 상임위원회인 행정안전위회 문턱 통과부터 제동이 걸렸다. 20대 국회 초기 자유한국당은 ‘과거사위 구성 방식’ 등을 문제 삼으면서 반대했다. 3년 여가 지난 뒤인 지난해에서야 행안위를 겨우 넘은 개정안은 이번엔 법사위에서 막혔다. 한국당은 활동 기간, 조사 대상의 범위 축소, 위원 구성 문제, 비공개 청문회 등을 요구하며 법안 통과에 반대했다. 그렇게 반년 넘게 묵혀있던 개정안은 여야가 ‘복잡다단’했던 패스트트랙(신속처리안건 지정) 대치 속에서 잊혀져 갔다.
공직선거법 개정안을 비롯해 각종 개혁 법안이 패스트트랙에 올려져 통과되던 지난해 연말 국회에서도 과거사법은 ‘본회의 통과 법안’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야당의 반대가 번번히 법안 통과를 막았다곤 하지만 여당 역시 당리당략과 국회 전략을 이유로 제대로 챙기지 못했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민주당 관계자는 “의석 수도 과반이 아니었던 데다가 급하고 산적한 입법이 많아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었다. 하지만 절대 포기한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과거사법 개정안은 현재는 여전히 법사위에 올려져 있는 상태다. 민주당은 본회의가 열리면 과거사법부터 우선 처리하겠다는 방침이지만 여야 협상 자체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으면서 지난 본회의에 안건 상정조차 되지 못했다.
형제복지원 원생들의 간식 시간(1987년 1월 촬영) | 경향신문 자료사진
■20대 국회에서도 ‘자동폐기’되나
개정안 처리는 여전히 ‘불투명’하다. 8일 본회의가 예정돼 있고, 여야가 새 원내대표를 선출하는 7·8일 이후 다시 본회의를 열 수 있을 지는 모르는 상황이다.
민주당 이인영 원내대표는 지난 3일 원내대표직 퇴임 고별기자간담회에서 20대 국회 때 통과시키지 못해 아쉬운 법으로 과거사법 개정안을 꼽았다. 그는 6일 최고위원회의에서도 “마무리하지 못해 매우 아쉽다”고 말했다.
민주당에서는 오는 8일 미래통합당 새 원내지도부가 선출되면 5월 중순쯤 20대 국회 마지막 본회의를 열어 과거사법 등을 처리하는 방안을 추진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전망은 밝지 않은 상황이다. 국회 행안위 관계자는 “새 여야 원내대표 의지만 있다면 충분히 합의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행안위 심사와 법사위 심사를 다시 거쳐야 하는 데다가, 여당이 과반 의석이 안되는 20대 국회 특성상 국회 임기가 끝나는 상황에서 야당의 협조 없이는 통과가 어려운 상황이다. 20대 국회 임기가 한달도 남지 않았지만 이대로라면 다시 다음 국회로 미뤄지는 ‘자동폐기’ 수순을 밟을 수밖에 없다는 예상도 나온다.
이날 최씨는 뜨거운 초여름 햇살을 오롯이 맞으며 국회 본청 건물을 향해 소리치고 있었다. 최씨는 “(20대 국회는) 식물 국회, 동물 국회, 그리고 민생 법안에 대해서는 30%도 안 되게 해결을 못 하고 있어요. 국가 폭력에 대한 과거사법에는 전혀 관심조차도 없는 것 같더라고요”라고 말했다. 국회 의원회관 앞을 오가는 의원들을 향해 그는 이날도 “이제 국회가 답해달라”고 외쳤다.
형제복지원 생존 피해자 최승우씨가 과거사법 제정을 촉구하며 6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이틀째 고공농성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