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성폭행 피해자” 56년 만의 재심 청구

권기정 기자

성폭행 시도 남성 혀 깨물었단 이유로 ‘억울한 옥살이’ 70대

강압적 수사·재판 속 남성이 피해자 둔갑 “정당방위 인정을”

6일 부산지방법원 앞에서 시민단체 회원들이 성폭력 피해자의 정당방위를 인정해달라고 촉구하고 있다. 성폭행을 시도하려던 가해자의 혀를 깨물었다가 옥살이를 한 최말자씨는 이날 56년 만에 재심을 청구했다. 연합뉴스

6일 부산지방법원 앞에서 시민단체 회원들이 성폭력 피해자의 정당방위를 인정해달라고 촉구하고 있다. 성폭행을 시도하려던 가해자의 혀를 깨물었다가 옥살이를 한 최말자씨는 이날 56년 만에 재심을 청구했다. 연합뉴스

성폭행하려는 가해자의 혀를 깨물었다가 중상해죄로 옥살이를 한 여성이 56년 만에 정당방위를 인정해달라며 법원에 재심을 청구했다.

성폭력 피해자인 최말자씨(74)는 부산여성의전화 등 353개 여성·시민단체와 함께 6일 오후 1시 부산 연제구 거제동 부산지법 정문 앞에서 ‘성폭행 피해자의 정당방위 인정을 위한 재심 개시 촉구’ 기자회견을 열었다.

최씨는 재심 청구에 앞서 “사법이 변하지 않으면 우리 후세까지 나 같은 피해가 이어질 수 있겠다는 절박한 생각에 이 자리에 섰다”고 밝혔다. 그는 “저의 억울함이 풀리고 정당방위가 인정돼 무죄가 되기를 바란다”며 “법과 사회가 변화돼 후손들에게 이런 오점을 남겨서는 절대 안 된다”고 말했다.

최씨는 18세이던 1964년 5월6일 저녁 성폭행을 시도하던 당시 21세 노모씨의 혀를 깨물어 1.5㎝가량 자른 혐의(중상해죄)로 이듬해 1월 부산지법에서 징역 10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재판 과정에서 최씨는 6개월간 옥살이를 했다.

최씨는 당시 검찰의 강압적인 수사를 견디며 정당방위였다고 주장했지만 법원은 인정하지 않았다. 검찰은 최씨가 노씨에게 상해를 입혔다며 조사 첫날 아무런 고지 없이 구속했다. 검찰은 노씨에게 강간미수 혐의를 적용하지 않았고, 특수주거침입 등 혐의로만 기소했다.

재판부도 “피고와 결혼해서 살 생각은 없는가”라고 되묻는 등 심각한 2차 가해를 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범행 장소와 집이 불과 100m 거리고, 범행 장소에서 소리를 지르면 충분히 주변 집에 들릴 수 있었다”며 “혀를 깨문 최씨의 행위는 방위의 정도를 지나친 것”이라고 판단했다. 언론도 ‘키스 한 번에 벙어리’ ‘혀 자른 키스’ 등 남성이 마치 피해자인 것처럼 보도했다.

사건 이후 오히려 주변에서는 “결혼하면 간단히 끝나지 않느냐”며 노씨와의 결혼을 권했다. 최씨는 “집에선 ‘이 가시나 때려 죽인다’고 난리였다”고 회상했다. 반면 가해자인 노씨는 사건 이후 최씨 집에 찾아와 흉기를 책상에 꽂는 등 행패를 부렸다. 결국 최씨 아버지가 노씨에게 돈을 주고 합의를 했다.

최씨는 2018년 ‘미투’ 운동이 한창일 때 용기를 내 부산여성의전화와 상담을 진행했고, 올해 재심 청구를 결심했다.

이날 부산여성의전화 등은 “피해자는 가족의 냉대와 마을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견뎌내며 하루하루 고통 속에 살아야 했다”며 “이제라도 정당방위를 외쳤던 피해자의 억울함을 풀고 인권을 회복하며, 여성의 방어권 인정과 56년 전 성폭력 사건의 정의로운 해결을 위해 재심 개시를 강력하게 요구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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