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체 고위 임원 ㄱ씨는 정부의 긴급재난지원금 100만원을 받을지 목하 고민 중이다. 그의 심내는 편치 않아 보였다. 본인 의사를 밝히는 대신 이렇게 말했다. “아내는 그러더라고요. 세금을 많이 내고 있는데…라고요.” 대통령부터 정부·여당 고위 인사들까지 재난지원금 기부 사실을 ‘공개적으로’ 전파하는 상황에서 그가 흔쾌히 100만원(4인 가구 기준)을 받기는 쉽지 않을 듯싶다. 1년에 내는 세금이 족히 1억원을 넘는 그에게 100만원은 큰돈이 아닐 게다. 말은 안 했지만 그가 정부나 사회로부터 자신의 기여가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 혹은 상대적 박탈감에 서운함을 느끼는 것은 아닐까.
![[편집국에서]“사장님, 재난지원금 받으셔도 됩니다”](https://img.khan.co.kr/news/2020/05/14/l_2020051501001611900128641.jpg)
재난지원금 기부가 누구의 아이디어였는지 모르겠지만 처음 접했을 때 ‘묘수’란 느낌도 들었다. 재정건전성을 우려해 지급대상을 소득하위 70%에서 100%로 확대하는 방안에 반대했던 사람들에게는 “그리 나라살람이 걱정된다면 기부하면 될 것 아니냐”는 암묵적 반박이었고, 기부 그 자체가 갖는 숭고함 때문에 대놓고 반대하긴 쉽지 않을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기부와 나눔이 소중한 사회자본이라는 데 이견이 있을 수 없다. 하지만 갈수록 재난지원금 기부가 ‘악수’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재난지원금을 기부해야 하는 상황으로 내몰리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면 뭔가 잘못된 것 아니냐는 것이다. 또 받는 사람들로 하여금 공동체를 위해 희생하지 못했다는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게 만들 수도 있다.
재난지원금의 목적은 가계에 소비 여력을 공급해 소상공인을 돕고 경기를 조금이라도 살리려는 데 있다. 시민들이 가계에 필요한 물품을 구입하고, 소상공인의 매출 증대에 도움이 되도록 소비를 유도하는 게 정부가 할 일이다. 이달 10일까지 수출이 1년 전보다 46% 줄었다는 통계가 보여주듯 수출 쪽에서 코로나19 충격이 본격적으로 가시화될 가능성이 높아 내수를 최대한 끌어올려야 하는 시점이다. 시민들의 발길이 동네 작은 가게로 이어지고, 소상공인들이 조금이라도 고통을 덜도록 돕는 게 시급하다는 얘기다.
재난지원금의 보편적 지급에 반대했던 쪽에서는 고소득층의 한계소비성향(새로 증가한 소득 중 소비에 쓰는 비율)이 저소득층보다 낮기 때문에 재난지원금 지급이 큰 효과가 없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경제이론적으로 그럴 수 있겠으나 고소득층이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배제당하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면 바람직한 일인지 묻게 된다. 고소득층은 현실적으로 국가 경제의 주요 세수원이다. 그들의 반발을 우려해 조세정의를 외면하는 일은 없어야 하겠으나 조세저항 심리가 발생하지 않도록 세심한 배려와 정책을 펴는 것 역시 정부의 책무다. 기부된 재난지원금은 고용보험기금의 부족한 재원을 충당하는 데 사용된다고 한다. 기부금액에 따라 국가 재정에 얼마나 도움이 될지 결정되겠지만, 즉각적으로 소비에 사용하는 것보다 체감효과는 늦게 나타날 가능성이 높다.
소득의 많고 적음을 떠나 공동체의 연대감을 위해서도 모든 시민이 재난지원금을 받는 게 낫다. 복지 대상이 수혜자와 비수혜자로 갈린다는 건 공동체 연대의식 훼손으로 이어질 수도 있는 법이다. 과거 부유층 노인을 지하철 무임승차 대상에서 제외해야 한다, 부유층 아이들은 학교 무상급식에 포함해선 안 된다고 하며 논란이 일었던 상황이 떠오르기도 한다.
문재인 대통령은 “기부는 선의의 자발적 선택입니다. 강요할 수도 없고 강요해서도 안 될 일입니다”라고 말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대통령이 이렇게 말했으면 어땠을까. “재정건전성 자신 있습니다. 저도 흔쾌히 쓸 테니 재난지원금이 어려운 가계에 보탬이 되고, 아무쪼록 소상공인들을 살리는 데 잘 쓰였으면 좋겠습니다”라고. 정치인이나 정부 관료들이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기부 사실을 공개적으로 언급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기부 유도 작용을 할 수밖에 없다. 기부 사실을 공개하는 모습 역시 보기에 불편하다. 차라리 기부란 말 자체를 꺼내지 않는 게 나을 듯싶기도 하다.
코로나19 파도를 넘는데 정부가 든든하게 뒤에 버티고 있다는 인식을 심어주는 게 진정한 리더십이다. 기왕 기부한 사람은 그렇다치고 아직 수령을 망설이고 있는 기업체 임원·최고경영자를 비롯한 고소득층이나 공직자들이 있다면 흔쾌히 받으시라 권고하고 싶다. 그간 미뤄둔 소비를 늘려주면서 내수 살리기에 도움을 주면 더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