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5월 20일 서울 강남역 10번 출구 앞에 지난 17일 새벽 인근 공용화장실 살인사건으로 희생된 여성을 추모하는 글들이 빼곡히 붙어 있다. /강윤중 기자
이서윤씨(가명·25)는 4년 전 5월19일 강남역 10번 출구를 찾았다. 절망스러웠다. 이틀 전 수많은 사람이 오가는 강남역, 익숙한 곳에서 비슷한 또래인 20대 여성이 살해당했단 사실을 알게 됐다. 가해자는 오가는 남성 6명을 보낸 뒤 범행을 저질렀는데 다수 언론에선 이를 ‘묻지마 살인’이라고 했다. 서윤씨는 학교 수업을 마친 뒤 홀로 강남역으로 향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 속에서 서윤씨는 포스트잇을 붙였다. “여자라서 죽었다.”
서윤씨의 외침은 그날 포스트잇에서 끝나지 않았다. 지난 4년 동안 낙태죄 폐지 운동, 혜화역 시위에 참여하며 관련된 메모와 스티커를 붙였다. 2020년 현재는 비혼 여성 커뮤니티를 운영하며 비혼에 대한 인식을 바꾸기 위한 스티커를 붙이기도 한다. 강남역의 포스트잇을 시작으로 서윤씨는 여성이 더 안전하고, 더 자유로운 사회로 바꾸기 위해 목소리를 내왔다.
시민들이 2016년 5월 20일 서울 강남역 10번 출구 앞에서 지난 17일 새벽 인근 공용화장실에서 일어난 살인사건 여성 피해자를 추모하고 있다. /강윤중 기자
“우연히 살아남았다” “여성이 조심하지 않아도 괜찮은 세상을 원한다“ “분노하고 행동해 바꾸고 말겠다”…. 4년 전 강남역 10번 출구는 1004개의 포스트잇으로 뒤덮였다.(▶관련기사: [강남역 10번 출구 포스트잇]경향신문이 1004건을 모두 기록했습니다). 2016년 5월17일 서울 지하철 2호선 강남역 10번 출구 인근 화장실에서 23세 여성이 살해됐다. 여성을 살해한 김모씨는 당시 경찰 조사에서 “평소 여성들에게 무시를 당해 범행했다”고 진술했다. 강남역 살인사건은 ‘여성혐오’에 대한 논의가 한국 사회 수면으로 떠오르는 계기가 됐다. 살인동기를 두고 ‘여성혐오’인지 ‘묻지마 살인’인지 논쟁이 오갔지만, 여성들은 이 사건을 ‘여성혐오’로 읽어냈다.
그 해 강남역 10번 출구에 붙은 여성들의 외침은 지난 4년간 수많은 곳에서 또 다른 포스트잇으로 등장했다. 권력형 성범죄, 스쿨미투, 텔레그램 성착취 등 다양한 여성혐오 사건에서 가해자 처벌을 요구하고, 피해자에게 연대하는 목소리가 포스트잇으로 전해졌다.
2018년 3월 서울 서대문구 이화여자대학교에서 제자를 성추행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는 음악대학 ㄱ교수 연구실 앞에 학생들이 쓴 항의 포스트잇과 문구가 붙어있다. / 권도현 기자 lightroad@kyunghyang.com
2018년에는 포스트잇이 대학가를 뒤덮었다. 교수의 성폭력·성추행 사실을 고발하는 미투운동이 이어지며 대학가 곳곳에 포스트잇이 붙었다. 학생들은 손바닥보다 작은 종이에 피해 경험을 이야기하고, 교수의 처벌을 촉구하는 운동을 벌였다. 고려대 국문과 K교수, 서울대 사학과 H교수, 성신여대 사학과 A교수, 이화여대 음악대학 S교수, 중앙대 아시아문화학부 K교수…. 성범죄로 고발된 수많은 ‘알파벳’ 교수들의 연구실이 포스트잇으로 빼곡하게 뒤덮였다. “우리는 우리의 용기다” “선생이란 지위를 남용하지 마세요” “젠더폭력 OUT” 등 학생들은 글을 남기며 권력형 성폭력으로부터 학생을 보호해달라고 요구했다.
2018년 4월 서울 용화여고 창문에 포스트잇으로 만든 ‘#WITH YOU’ ‘#WE CAN DO ANYTHING’ ‘#ME TOO’ 글자가 붙어있다. 용화여고 학생회 페이스북 갈무리.
고등학교와 중학교에도 포스트잇이 등장했다. 2018년 4월 서울 용화여고 창문에는 형형색색의 포스트잇이 붙었다. 학생들은 포스트잇으로 ‘#WITH YOU’ ‘WE CAN DO ANYTHING’ ‘#ME TOO’ 글자를 만들어냈다. 교내 성폭력을 고발하는 ‘스쿨미투’의 시작이었다. 졸업생들로 구성된 용화여고 성폭력뿌리뽑기위원회가 ‘용화여고 내 성폭력 실태조사’를 진행했을 때, 응답자 96명 중 41명이 교사들로부터 상습 성추행 및 성희롱 당한 적 있다고 답하며 ‘스쿨미투’가 공론화됐다. 학생들은 이후에도 “당신의 용기를 지지합니다” “여자에게 조심하라 가르치지 말고, 남자에게 강간하지 말라 가르쳐달라” 등 포스트잇을 붙였다.
시민단체 ‘정치하는 엄마들’에 따르면 지난 2월 기준 전국의 100개 학교가 스쿨미투에 동참했다. 그만큼 포스트잇도 전국 곳곳에 붙었다. 인천의 신송중학교, 서울 광진구의 광남중학교 등 학교에 가해 교사의 언행을 지적하거나, 피해 학생에게 연대하는 포스트잇이 줄을 지었다. “우리는 여기있다” “우리는 서로의 용기다” “여성의 외침을 들어주세요” 등 강남역 10번 출구에 붙었던 문구들이 중학교 교실과 복도, 계단에도 등장했다.
‘#n명의 연대자_n명의 감시자_우리가 여기있다’ 해시태그와 함께 텔레그램 성착취 사건의 강력 처벌을 요구하고, 피해자에게 연대하는 내용의 포스트잇이 화장실, 전봇대, 상가 건물 등 곳곳에 붙어있다. N번방 성착취 강력처벌 촉구시위팀 제공
“피해자는 일상으로, 가해자는 감옥으로” “n명의 연대자, 우리가 여기있다” 포스트잇은 2020년에도 이어진다. 텔레그램 성착취 사건이 알려진 후 디지털 성범죄 근절을 위한 릴레이 포스트잇이 전봇대, 화장실, 지하철역 등에 붙기 시작했다. 텔레그램 성착취를 모니터링하고 공론화해 온 ‘포르젝트 리셋(ReSET)’은 지난달부터 피해자에게 연대하고 가해자의 강력 처벌을 촉구하는 내용의 포스트잇을 공공장소에 붙이는 운동을 제안했다. 시민들은 “텔레그램 성착취까지 이어져 온 악의 연대기를 끊어내자” “우리는 세상을 바꿀 것” 등 글을 남겼다.
강남역 10번 출구 포스트잇에 붙었던 외침들은 현재진행형이다. “여성혐오를 멈추세요” “운이 좋아 살아남은 게 아니라, 잘 살고 싶습니다” 등 외침은 수백개의 포스트잇을 통해 4년 동안 이어져왔다. 그럼에도 학생들에게 ‘알파벳’으로 불리는 대학 교수들과 ‘스쿨미투’ 가해 교사는 낮은 수준의 징계를 받고 교단으로 복귀한다. 가해자가 재판을 받는 동안 교내에선 2차 가해가 이뤄지고, 또 다른 폭로가 이어지기도 한다. 텔레그램 성착취 사건은 지난 3월 조주빈을 시작으로 ‘갓갓’ 문형욱 등을 검거했으나 여전히 수사와 재판을 남겨두고 있다. 포스트잇을 붙이는 여성을 향해 일부 남성들이 조롱하고 비난하는 일들도 반복된다.
서윤씨는 지난 4년 동안 많은 것이 바뀌었지만, 여전히 바뀔 부분이 남았다고 말한다. “강남역 살인사건 당시에는 ‘여성혐오 범죄’라는 사실을 이해시키기도 어려웠는데 텔레그램 성착취 사건에 대해서는 많은 이들이 분노하고 있어요. 여성을 대상으로 한 범죄에 대한 인식이 그나마 바뀌었다고 봐요. 그럼에도 제도적인 부분은 여전히 느리게 바뀝니다. 텔레그램 성착취 사건 등 앞으로도 관심을 갖고, 여성이 더 안전한 세상으로 바뀔 때까지 행동하고 지켜볼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