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썽도 장난도 아닙니다…‘불편·답답’ 극복하려는 삶의 행동이죠읽음

김소영

작은 키로 세상 살아가기

대중교통 좌석 기어서 오르기, 까치발로 높은 곳 물건 꺼내기…

일러스트 | 김상민 기자

일러스트 | 김상민 기자

마스크 사러 줄 선 아이에게 “살 수 있나” 어떤 할아버지의 뜻밖 물음
‘아무리 몸집 작아도 한 명은 한 명’…어른들이 그 사실을 깜빡하는 듯

어느 휴일 저녁, 세준이 어머님이 연락을 주셨다. 세준이와 사촌동생들을 데리고 딸기농장 체험을 다녀오는 길이라며, 아이들이 직접 딴 딸기를 나눠 드리고 싶어하는데 잠깐 들러도 되겠느냐는 말씀이었다. 세준이 사촌들은 나와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살아서 오며가며 본 적이 있었다. 어린이들의 깜짝 방문도, 신선한 딸기도 당연히 환영이었다.

밤에 초인종이 울렸을 때는 나와 남편이 함께 나가 문을 열었다. 아홉 살, 일곱 살, 네 살 어린이 셋이 조르르 서서 연습이라도 한 듯 큰소리로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했다. 마주 인사를 하고, 딸기를 받고, 감사를 전하고, 딸기를 따는 요령에 대한 세 전문가의 짧은 강의를 듣는 동안 내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은 ‘어린이는 정말 작구나’ 하는 것이었다. 평소와 다른 환경에서 만나 그랬는지, 딸기 상자가 커서 그랬는지, 셋을 함께 본 건 처음이라 그랬는지 모르겠다.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세요” 하고 공손히 접대하던 남편도 어린이 손님들이 탄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자 감탄하는 듯이 말했다. “정말…작네요.”

어린이와 만나는 일을 하면서도 나는 어린이가 ‘작다’는 사실에 새삼 놀라곤 한다. 예를 들면 독서교실에 새로 들인 화분이나 장식품을 보려고 어린이들이 까치발을 할 때 그렇다. 나름대로 신경을 써서 배치하는데도 제일 작은 어린이 기준에는 못 미칠 때가 있는 것이다. 책장 맨 윗줄에는 청소년 책을 꽂아 두었는데, 그 줄에 무슨 책이 있는지 굳이 살펴야겠다며 아홉 살 어린이가 의자를 놓고 올라갈 때도 ‘저게 정말 안 보이는구나’ 싶다. 수업을 시작하기 전, 먼저 온 어린이가 나중에 오는 어린이를 놀라게 하려고 몸을 숨길 때도 마찬가지다. 교실이 조그마해서 내가 보기엔 숨을 곳도 없는데 어린이들은 감쪽같이 잘도 숨어서 일단 내가 먼저 놀란다. 덕분에 숨바꼭질은 몸집이 작아야 할 수 있는 놀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여행지 관광 안내소 직원에게 엄마 아빠가 지도며 상품 할인 쿠폰 등을 받고 이런저런 안내를 받는 동안 데스크 위에서 일어나는 일을 알고 싶어서 기를 쓰는 어린이를 본 적이 있다. 불편한 자세로 딱 붙어 서서는 “그게 뭐야?” “어디로 가래?” “나도 볼래”. 계속해서 질문과 의견을 쏟아냈다. 그전 같았으면 ‘어린이들은 밖에 나오면 말을 더 안 듣는다더니, 정말 보채는구나’ 하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그런데 그때는 저 어린이가 얼마나 불편할까 싶었다. 여행을 와서 들뜨고 이것저것 궁금한 것은 나나 어린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중요한 정보가 오가는 대화에 참여하기는커녕 뭐가 어떻게 되어가는지 제대로 볼 수조차 없으니 얼마나 답답하겠는가.

어린이는 어른보다 작다. 그래서 어른들 눈에 잘 띄지 않는다. 큰 어른과 작은 어린이가 나란히 있다면 어른이 먼저 보일 것이다. 그런데 어린이가 어른의 반만 하다고 해서 어른의 반만큼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어린이가 아무리 작아도 한 명은 한 명이다. 하지만 어떤 어른들은 그 사실을 깜빡하는 것 같다.

마스크 5부제 시행 전, 동네 농협에서 1인당 5장 한정으로 마스크를 판매하는 날이었다. 나도 아침에 나가 줄을 섰는데, 면 마스크는 가지고 있지만 방역 마스크는 한 장도 없던 참이라 혹시 못 구하면 어떡하나 걱정이 들었다. 줄을 선 사람들도 비슷한 마음인지 공기가 침울했다. 목을 빼고 자기 앞에 몇 명이 서 있는지 세어 보기도 했다. 그런데 내 뒤쪽에서 소리 내어 사람 수를 세던 한 할아버지가 대뜸 앞쪽을 향해 외쳤다.

“거기, 다 마스크 살 거예요? 거 애들도 살 수 있나?”

의문문이지만 누가 들어도 호통에 가까웠다. ‘거기’로 지목된 여성분은 자녀로 보이는 어린이 둘과 함께였다. 네댓 살 되어 보이는 어린이는 서 있고, 그보다 어린 아이는 여성분에게 안겨 있었다. 여성분은 잠시 당황한 얼굴로 할아버지를 보더니 곧 침착하게 대답했다.

“그럼요, 얘네도 한 명씩인데요.”

그날 집에 돌아와 ‘애들도 마스크 살 거냐’던 할아버지 말을 곰곰이 생각해봤다. 설마 애들보다 어른이 우선이라는 뜻은 아니었겠지. 그냥 되도록 자신에게 유리하게 계산하고 싶은 마음이 앞섰을 것이다. 아니면 판매되는 마스크가 성인용이라고 생각해서, 어린이가 ‘동원’되는 것이 정당치 않다고 여긴 걸까? 하지만 그것은 할아버지가 상관할 일이 아니다. 어린이용이 준비되어 있을 수도 있고, 설령 없다고 해도 그 상황을 부당하게 여길 사람은 일껏 줄을 섰는데도 자기 몫의 마스크를 구하지 못한 어린이지, 할아버지가 아니다. 나는 평소에 사람 수를 셀 때 어린이를 ‘한 명’으로 세는 데 익숙하지 않아서 그런 거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분에게는 어린이 둘이 어른에게 딸려 있는 것으로 보인 것 같다. 만일 어린이들 덩치가 할아버지만 했다면 뒤에서 헷갈리지 않았겠지. 할아버지도 한 명, 어린이도 한 명이라는 사실이.

돌발 행동 같은 일들도 통제 불능 아닌 감각이 달라 그렇게 보일 뿐
어린이 눈높이 맞추려면 ‘나를 낮추기보다 주변이 커지는 상상’ 필요

어린이가 횡단보도를 건널 때 손을 드는 것은 운전자의 눈에 잘 띄기 위해서다. 몸집이 작아서 눈에 띄지 않을까 봐 조금이라도 커 보이려는 것이다. 대중교통의 좌석에 앉을 때 기어서 올라가야 하는 어린이도 있다. 어른이 한 걸음 걸을 때 어린이는 두 걸음을 걸어야 한다. 어린이는 비 오는 날 투명우산을 써서 시야를 확보한다. 어린이가 작은 몸으로 이 세상을 살아간다는 건 이렇게 현실적인 문제다.

독서교실에 강아지 달력을 들여놓으면서 제일 작은 어린이에게도 잘 보이는지 확인하려고 쪼그리고 앉아본 적이 있다. 이른바 ‘눈높이’를 맞춰보려던 것이다. 그러면 어린이의 시야를 경험해볼 수 있으리라 내심 기대했는데, 주변 환경이 영 어색하게 느껴졌다. 키가 작다고 해도 사물이 그런 식으로 보이지는 않을 것 같았다. 왜 그럴까? 나와 어린이는 키만 다른 게 아니라 공간에 대한 인식 자체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림책 작가 안노 미쓰마사는 <스스로 생각하는 아이>에서 그것을 원근감의 차이로 설명한다. 멀리 떨어진 사물의 크기는 비교하기가 어려운 법인데, 어린이는 어른보다 두 눈 사이가 좁기 때문에 ‘비교하기 어려운 지점’이 어른보다 가까이 있다는 것이다.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 있는 범위가 어린이 쪽이 더 좁다는 뜻이다. 어린이가 돌발 행동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단지 통제 불능이어서가 아니라 감각이 다른 까닭도 있을 것이다. 어른이 되어서 어린 시절 살던 동네에 가 보면 ‘좁아’ 보이는 것 역시 공간 감각의 차이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니 내가 아무리 테이블 아래로 기어들다시피 눈높이를 낮추어도 어린이와 똑같은 방식으로 볼 수는 없다. 공간의 구조나 사물의 위치를 알고 있는지 여부도 각자가 보는 방식에 영향을 끼칠 것이다. 만일 어린이가 보는 방식으로 보고 싶다면 내가 작아지는 것보다 주변의 모든 것이 커진다고 상상하는 쪽이 낫다. 길을 걷다가 고개를 옆으로 돌리면 누군가의 허벅지나 허리가 있다. 버스 타이어 지름이 내 키만 하다. 손을 씻으려면 세면대에 겨드랑이까지 걸쳐야 한다. 마트 계산대에서 내 물건이 제대로 처리되고 있는지 확신할 수 없다….

어린이와 어른의 척도가 이렇게 다른데 세상이 돌아가는 것이 놀랍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린이는 몸집이 커본 경험이 없기 때문에 다른 가능성을 생각해볼 여지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왜 그동안 이런 생각을 안 해봤을까? 어른이 되고서 “크니까 좋구나. 속이 다 후련하다!” 했을 법도 한데. 일단은 내가 천천히 자랐기 때문이다. 날마다 조금씩, 거의 느껴지지 않는 속도로 자라면서 어른들 중심의 세상에 적응해왔을 것이다. 덕분에 멀미를 하지는 않았지만, 대신 어린 시절에 얼마나 불편했는지도 까맣게 잊고 말았다.

어린이는 가만히 서서 자라지 않아…어른을 보고 배울 기회 제공해야
어리고 작다는 이유로 배제할 것이 아니라 마땅히 ‘한 명’으로 대접을

부끄럽지만 인정해야 하는 사실이 한 가지 더 있었다. 그동안 나는 불편하지 않기 때문에 이런 격차에 대해서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 그런 영역이 얼마나 많을까? 어린이에 대해 생각하다 보면 장애인, 성소수자, 이주민 등 여러 소수자들에 대해 내가 얼마나 무지하고 둔감했는지 깨닫게 된다. 어린이는 자라서 어른이 되기 때문에 소수자라기보다는 과도기에 있는 사람들이 아닌가 생각해보기도 했다. 그런데 나 자신을 노인이 될 과도기에 있는 사람이라고 여기지 않는 것처럼, 어린이도 미래가 아니라 현재를 기준으로 생각하는 것이 맞다. 또 어린이가 청소년이 되고 어른이 되는 사이에 늘 새로운 어린이가 온다. 달리 표현하면 세상에 늘 어린이가 있다. 어린이 문제는 한때 지나가는 이슈가 아니다. 오히려 누구나 거쳐가는 시기이기 때문에 모두가 머리를 맞대고 고민해야 하는 일이다.

어린이가 일으키는 말썽, 장난, 사고의 많은 부분은 어린이가 작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다. 어린이가 의자에 앉아 발을 가만 두지 못하고 흔들어대는 것은 발이 땅에 닿지 않기 때문이다. 땅에 닿는다면 흔들려고 해야 흔들 수도 없을 것이다. 어린이가 위험을 무릅쓰고 책장을 기어올라가 높은 데 있는 물건을 꺼내려는 것은 책장이 크고 튼튼해 보이기 때문이다. 기어오르지 않으면 손이 닿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세 번째 계단에서 뛰어내리는 데 성공했으니까 다섯 번째 계단에서도 될 것 같아서 시도했다가 다치고 혼난다. 미술관은 어차피 넓으니까 괜찮을 것 같아서 뛰어다니다가 야단을 맞는다.

그렇기 때문에 어린이는 어른을 보고 배울 기회가 필요하다. 어린이는 가만히 서서 키만 자라지 않는다. 어린이에게는 성장할 공간이 필요하다. 공공장소에서도 어린이는 마땅히 ‘한 명’으로 대접받아야 한다. 어린이라는 이유로 배제할 것이 아니라 어린이도 누릴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쪽으로 어른들이 지혜를 모으는 게 옳다. 어린이는 그런 공간에서 배우며 자랄 것이다. 안전하게 자랄 공간도 필요하다. ‘스쿨존’은 최소한의 공간이다. 어린이가 어른과 다른 시야를 가졌다는 이유로 자동차로부터 위협당하지 않을 공간. 어린이가 어른이 되려면 무엇보다도 살아남아야 하기 때문이다.

딸기 상자를 머리 위로 번쩍 들어 전해주었던 세준이는 지금 나보다 키가 큰 청소년이 되었다. 이제 세준이 눈에는 뻔한데 내 시야에는 들어오지 않는 것들이 있을지 모른다. 세준이는 알고 나는 모르는 것도 점점 많아질 것이다. 그 차이가 아주 커졌을 때도 세준이 세대와 나의 세대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살아갈 수 있을까? 그 답은 오늘의 어른이 어떤 세상을 가꾸어가느냐에 달려 있다.



[김소영의 어린이 가까이]말썽도 장난도 아닙니다…‘불편·답답’ 극복하려는 삶의 행동이죠

▶필자 소개

독서교실에서 어린이와 함께 읽고 쓰고 배우고 가르친다. 비양육자로서, 돌봄과 교육의 틀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어린이’에 관심이 많다. 어린이에게 좋은 세상이 어른에게도 좋은 세상이라고 믿는다. <어린이책 읽는 법> <말하기 독서법>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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