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어머니는 컴퓨터였다

손희정 문화평론가

“내 어머니는 컴퓨터였다.”

문화연구자 앤 마리 발사모는 정보 테크놀로지와 여성이 맺어온 복잡한 관계를 탐구하는 글을 이렇게 시작한다. 그의 어머니는 ‘전자 회로를 이용한 고속 자동 계산기’인 기계 컴퓨터가 등장하기 전에, 계산을 담당했던 인간 컴퓨터(computer, 계산원)였다.

손희정 문화평론가

손희정 문화평론가

여성 컴퓨터의 모습은 영화 <히든 피겨스>(2017)에서 볼 수 있다. 영화의 주인공이자 실존 인물이기도 한 도로시 본은 1960년대 초 미국 항공우주국(NASA·나사)에서 근무하던 여성 보조 계산원들을 이끄는 팀장이었다. 이후 나사에 IBM 컴퓨터가 들어오자, 이들은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배워 이 신문물을 구동하는 일을 맡게 된다.

이는 몇 가지 사실을 보여준다. 첫째, 정보 테크놀로지 발달 초기, 여성들은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었다. 둘째, 테크놀로지의 발전과 함께 여성의 일자리는 기계로 대체되었다. 셋째, 그러나 그 기계를 구동하기 위해서는 여전히 인간의 노동이 필요했다. 마지막으로, 그 자리는 남성들의 일자리가 되어갔고, 기술의 역사에서 여성들의 활약은 지워져버렸다.

얼마 전, 화상회의 앱 줌(zoom)으로 언택트(비대면) 형식의 강의를 하게 되었다. 수강 신청을 받고, 줌 강의실을 개설하고, 강의 시작 시간에 맞춰 수강생들이 줌 강의실에 입장할 수 있도록 한 명 한 명 허가를 내준 것은 실무를 담당하고 있는 여성 연구 노동자였다. 두 시간 내내 ‘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에 대해 떠들었지만, 내가 한 어떤 이야기보다 그의 모습이 가장 중요한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강의를 가능하게 하는 구체적인 노동은 여전히 사람이 하고 있다는 것. 그걸 확인하면서 발사모와 본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이미 도래한 언택트 산업의 시대와 함께 ‘노동이 종말할 것’이라고들 한다. 하지만 사이버스페이스는 인간의 테크놀로지가 생산하는 가상공간으로, 반드시 컴퓨터라는 물질적인 기계와 전기를 필요로 한다. 그리고 그것들을 생산하고, 유통하고, 관리하고, 사용하는 노동은 아직까지는 인간의 일이다. 성급하게 ‘노동의 종말’을 말하는 것은 실제로 존재하는 노동을 비가시화해서 노동자들을 더 열악한 조건으로 내쫓는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최근 오마이뉴스에 올라온 기사 “재택근무 하자마자 월급 줄어… 콜센터 상담원이 겪는 이중고”는 이런 문제를 잘 보여준다.

콜센터가 감염에 취약하다는 사실이 드러나자, 기업들에서는 근무 환경을 개선하기보다 재택근무를 결정한다. 언론에서는 신속한 재택근무 전환이 한국의 IT 인프라와 기술력 덕분이라고 치켜세웠다. 그리고 코로나19를 계기로 재택근무와 비대면 업무에 대해 더 적극적인 논의를 이어가야 한다고 제안했다.

하지만 재택근무를 시작한 콜센터 직원들은 이 상황을 그저 환영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노동자가 알아서 재택근무를 위한 장비(개인 컴퓨터와 헤드셋 등)와 근무 공간을 마련해야 했고, 그에 더해 교통비, 식대 등이 급여에서 빠지면서 월급이 줄었다. 안 줘도 되는 돈을 계산하는 데에 재빨랐던 기업은 줘야 할 돈에 대해서는 모르는 척하는 묘기를 부렸다. 더군다나, 재택을 하는 여성 노동자들이 돌봄노동의 이중고에 시달려야 한다는 건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일자리가 줄어드는 상황에 대한 대안으로 기본소득이 언급된다. 나는 이 논의들을 긍정적인 태도로 따라가고 있지만, 노동을 논하는 방식은 좀 염려스럽다. 어떤 일들은 언제든지 기계로 대체될 수 있는 ‘하찮은’ 일로 여겨지고, 그 자리에서 일하고 있는 이들의 존엄과 노동의 가치는 이야기되지 않는다.

노동자들은, 그러니까 우리는, 그저 해고되어 집에서 ‘놀게’ 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비슷한 노동을 이어가되, 더 힘든 조건에서 지속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한국 사회가 위기 관리의 단기 플랜과 장기 플랜을 잘 세우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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