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을 끌어안고 떠난 지 18년
두 소녀의 원한을 푸는 일은
일상의 전쟁터가 된 한반도를
‘평화의 최전선’으로 만드는 것
18년 전, 꽃보다 아름다운 너희들이 미군의 장갑차에 치인 처참한 모습으로 누워 있는 사진을 보며 오열했단다. 도대체 그때 부처님은, 하느님은 어디에 계셨는지, 원망과 한이 하늘을 찌르는구나. 한반도의 고통을 고스란히 껴안고 간 우리의 딸들아! 우리가 너희들을 대신해 갔어야 했는데 살아 있는 것 자체가 한없이 부끄럽다.

원익선 교무·원광대학교 평화연구소
너희 몸 위로 지나간 장갑차는 이 나라 백성들을 짓누르는 고통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일제는 한반도를 자신들이 보호해야 될 여성으로 전락시켜 이 땅을 침탈했단다. 그들은 강탈한 이 땅을, 마구잡이로 노략질했지. 위안부는 그 고통의 일부란다. 해방 후 또 다른 외국 군대가 들어와 이 국토를 맘껏 휘젓고 다녀도 이 나라의 위정자들은 사대근성으로 침묵하고 있다. 주객이 전도되어 군대와 경찰은 그들을 지키기 위해 이리저리 끌려 다니고 있단다.
너희들의 죽음을 미군은 “불의의 사고”라고 했다. 그러나 모든 정황이 말해주듯이 그것은 미군 장갑차에 의한 명백한 살인이었음을 오히려 너희들이 잘 알고 있겠지. 미군은 지금까지 그 누구도 책임지지 않았다. 그들은 점령지에서 아이들 몇 명 죽인 것이 무슨 대수라도 되느냐고 생각했지. 군대는 오직 목표가 하나란다. 사람을 죽이는 것. 이익과 감정에 위배된다면 무조건 죽이는 것 외에 무엇이 더 있을까. 너희는 그러한 살인기계, 전쟁기계의 희생자다. 모든 군대, 모든 전쟁은 여성과 아이들과 노인들에 대해서는 애초에 적대적이지. 그러니 그들의 눈에는 너희와 같은 아이들은 보여도 존재하지 않아. 더욱이 여성들은 소유하고 짓밟아도 좋은 전리품이자 약탈의 대상이야.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 했거늘 어째서 너희들은 처절하게 죽어야만 했을까. 너희들이 무슨 이념을 가졌기에 그렇게 살육했을까. 그들은 조직의 부속품에 불과하단다. 그 위에는 국가가 있다. 베버라는 학자는 일찍이 국가는 폭력을 합법적으로 사용하는 권리를 가진 단체라고 보았단다. 애초에 비도덕적인 군대는 그 폭력을 행사하는 조직이고. 그러니 너희들이 훈련 중에 죽임을 당했어도 그들은 어떤 죄책감도 가지고 있지 않겠지. 승인한 사람 아무도 없는데 미군은 1945년 9월 이 땅에 들어와서는 눌러앉아 버렸단다. 해방으로 정신없는 사이에 이 나라를 통치했다.
그 후로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미군은 이 땅의 백성을 죽였단다. 큰 힘 아래에서 작은 힘들이 원심력으로 약자를 포획하는 구조가 형성됐어. 그래서 윤금이씨를 비롯한 수많은 여성들이 미군들의 군홧발 아래 쓰러졌지. 지금도 소성리에는 노쇠한 우리 어머니, 할머니들이 손자손녀들이 살아갈 고향을 지키기 위해 뙤약볕 아래 사드철폐투쟁을 하고 있단다. 일상의 전쟁터가 되었어. 헨리 소로는 흑인차별에 대해 “우리가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고는 국가와 어떤 관계도 맺을 수 없다”고 했는데, “미국이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고는 우리는 그들과 어떤 선린관계도 맺을 수 없다”는 말을 돌려주고 싶구나.
미국은 자신의 영토처럼 이 땅에 신무기를 맘껏 배치하고, 전투기도 맘대로 날리고 있다. 심지어 미군범죄를 단죄하는 사법권도 우리가 완전히 행사하지 못한다. 너희의 죽음으로 우리 백성에 대한 미국의 비하와 멸시의 집단적 무의식을 확인했다. 대낮에 어린 백성 둘을 죽이고도 무죄라니.
어른들이 힘이 없어 너희들의 한을 풀어주지 못해 미안하구나. 평화를 사랑하는 평범한 사람들이 너희의 안식을 위해 이제야 평화공원을 만들었다. 천국에서 언제든 내려오렴. 너희는 이미 별이 되어 우리를 지켜주고 있겠지. 힘센 나라들이 이 땅을 흔들어 길을 잃고 헤맬 때, 등대 같은 북극성처럼 너희들이 안내해주리라 믿는다. 너희들을 위해 치켜든 촛불이 강물처럼 흘러 탄생한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현충일에 “평화는 국민이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이며, 두 번 다시 전쟁 없는 평화의 한반도를 만드는 것은 국민이 부여한 국가의 책무”라고 한 말을 너희에게도 전한다. 사랑하는 우리의 딸들아, 편히 쉬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