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유세, 하루 연기…‘그날 거기’가 문제인 이유

김향미 기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13일(현지시간) 뉴욕주 웨스트포인트 육군사관학교에서 열린 졸업식에 참석해 연설하고 있다. 웨스트포인트|AFP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13일(현지시간) 뉴욕주 웨스트포인트 육군사관학교에서 열린 졸업식에 참석해 연설하고 있다. 웨스트포인트|AFP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오는 19일 오클라호마주 털사에서 선거 유세를 재개하려다 “노예해방 기념일에, 흑인 대량학살이 있었던 곳에서 유세를 재개하려 한다”는 비판이 거세지자, 유세 일정을 하루 연기했다. 백인 경찰관의 가혹행위로 흑인 남성 조지 플로이드가 숨진 후 인종차별과 불평등에 항의하는 여론이 거센데도, 트럼프 대통령은 보수 지지층 결집을 위해 인종차별적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12일(현지시간) 자정 무렵 트위터에 “오클라호마 털사에서 6월19일 집회를 열 계획이었지만, 이날 노예해방 기념일과 겹친다”며 “이날의 의미를 기리고자 집회를 20일로 옮기기로 했다”고 밝혔다. 지난 10일 유세 재개 계획을 밝힌 지 약 이틀 만이다.

13일 미 뉴욕타임스는 트럼프 대통령이 ‘그날(6월19일), 거기(털사)’에서의 유세 계획을 밝힌 후 거센 비판을 받은 배경을 보도했다. 1863년 1월 에이브러햄 링컨 전 대통령이 노예해방을 선언한 후 2년여 뒤인 1865년 6월19일 텍사스주에서 마지막 흑인 노예가 해방됐다.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은 이날을 “해방, 독립, 자유의 날”로 기려왔으며, 텍사스주 등 40여개주가 휴일로 지정했다.

올해는 특히 플로이드 죽음 이후 그 의미가 한층 더 부각되고 있다고 신문은 전했다. ‘흑인 생명은 소중하다’ 운동에 힘입어 트위터와 복스미디어, 나이키 등 기업들도 ‘유급 휴일’로 지정했다. 미 듀크대의 아프리카계미국인연구학 교수인 마크 앤소니 닐은 “올해 노예해방의 날은 예전과 좀 다르다. 인종차별 문제가 미국 문화를 흔드는, 파열을 보고 있다”고 했다.

유세지로 털사를 선택한 것도 문제가 됐다. 털사엔 ‘블랙 월스트리트’라 불릴 정도로 부유한 흑인 상업지구(그린우드)가 있었다. 1921년 5월31일~6월1일 무장한 백인들의 총격·방화·약탈로 300여명의 흑인이 학살됐다. 이 사건은 역사적으로 흑인 공동체의 경제력 향상을 물리적으로 막은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흑인 카멀라 해리스 상원의원(민주·캘리포니아)은 11일 트위터에 “백인 우월주의자들에게 눈짓하는 것을 넘어 홈파티를 열고 있다”고 맹비난했다. 흑인대학 프레리 뷰 A&M 대학의 정치과학 교수인 멜라니 프라이스는 뉴욕타임스에 “(트럼프 대통령은) 인종차별 항의 시위가 온나라를 흔들고 있을 때, 노예해방을 축하하는 날, 백인 우월주의로 인종 제거가 일어났던 곳에서 유세를 한다고 한다. 누가 봐도 문제가 아닌가”라고 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12일 폭스뉴스 인터뷰에서 일부러 6월19일로 유세 날짜를 정했다는 의혹을 부인하며 오히려 ‘축하’의 의미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반박했다. 공화당의 미디어 고문인 패리스 데나드는 13일 블룸버그 통신에 “트럼프 대통령과 최근 그린우드 폭동에 대해 얘기했고, 트럼프 대통령은 ‘흑인 공동체의 경제 파괴’의 사례로 보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미 CNN은 13일 트럼프 대통령의 인종차별 전력을 고려할 때 이번 유세 역시 백인 우월주의자 결집 목적으로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라고 분석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최근 인종차별 반대 대규모 시위와 관련해 “수많은 점잖은 백인 미국인들을 인종차별주의자나 편견에 사로잡힌 사람들로 규정하지 말라”고 경고했으며, 시위대 강경 진압을 요구해 논란을 일으킨 바 있다. 미 국방부가 과거 노예제를 옹호하던 남부연합의 장군 이름을 딴 군 기지 명칭 변경을 고려하겠다고 하자 제동을 걸기도 했다.

블룸버그 통신은 13일 “미국 내 보수층도 인종차별과 거리를 두기 시작하는 상황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혼자 노골적로 차별적인 언사를 되풀이하면서 점차 반감도 커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블룸버그는 트럼프 대통령의 차별언사는 2016년 대선승리를 견인한 경합주(스윙 스테이트)의 백인 유권자들을 향한 지지호소로 관측되지만 그런 전략 때문에 일부 공화당원들이 트럼프 대통령으로부터 점점 더 멀어지고 있다고 했다.

이런 분위기를 의식한 듯 트럼프 대통령은 유세 일정을 연기한 데 이어 13일 뉴욕주 웨스트포인트에 위치한 육군사관학교 졸업식에 참석해 “노예제의 악습을 철폐하기 위해 피로 물든 전쟁에 나가 싸우고 승리한 남성들과 여성들을 우리에게 제공해준 것도 이 학교(육사)였다”고 말했다. 또 흑인 민권운동 당시 육사 생도의 역할을 언급하고, 지난해 사고로 숨진 흑인 사관생도를 추모하기도 했다. 성난 흑인 민심을 달래기 위한 행보라는 해석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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