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은 사회가 지향하는 기본 이념을 가장 포괄적으로 표현한다. 그런데 개인적으로 전혀 공감이 안 되는 조항들이 있다. 헌법 32조의 1항과 2항. 이 조항들에 따르면 ‘모든 국민’은 근로의 권리를 가지며 또한 근로의 의무를 지고 있다. 과연 먹고살기 위해 일해야만 하는 상황을 권리라고 불러야 하는가, 그리고 이것을 모든 국민이 의무로 져야 하는가. 나로서는 납득이 되지 않는다. 다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은 많은 사람들의 유일한 생존책이고, 이 조항들 없이는 국가를 향해 고용과 임금에 관한 대책을 요구할 근거가 없어 현실로서 받아들이고 있을 뿐이다.

고병권 장애학궁리소 연구원
그런데 최근 역사 문헌들을 읽다가 ‘노동의 권리’라는 말을 헌법에 담고자 했던 투쟁에 내가 생각하지 못한 의의가 있음을 알게 됐다. 1848년 혁명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부르주아들과 협력해서 왕정을 타도한 파리의 노동자들은 정부를 향해 국민작업장의 설립을 요구했다. 예전에 나는 이것을 실업자들에 대한 일자리 대책으로만 읽었다. 그런데 이번에 차분하게 읽어보니 뭔가 다른 게 있었다.
국민작업장을 처음 제안한 루이 블랑은 노동자의 운명을 기업가의 손아귀에서 최대한 빼내고 싶어 했다. 그의 구상에 따르면 국민작업장의 노동자는 자본가를 위해서 일하는 게 아니다. 노동자들은 사회적 인프라를 구축하는 일을 한다. 블랑은 노동자의 노동을 최대한 공적 생산활동으로 만들고 싶었던 것이다.
언뜻 보면 국가에 기업이 되어 노동자를 고용하라는 요구 같지만 사실은 노동을 바라보는 시각이 전혀 다르다. 국민작업장에서 국가와 노동자의 관계는 기업과 노동자의 관계가 아니라 사회와 생산적 구성원의 관계라고 보는 편이 옳다. 노동자는 생산자로서 사회가 필요로 하는 노동을 수행하고(그럴 권리와 의무가 있다), 사회는 공적자금을 투입해서 이들 노동자의 생계를 보장하는 식이다. 역사학자 볼프강 몸젠의 표현을 빌리자면 국민작업장은 “공적자금으로 보조하는 대범한 생산공동체 건설 계획”이었다.
최중증장애인들에게
노동의 권리를 부여하고
기업의 이윤보다 값진
사회적 생산활동임을 인정
서울시의 실험이 성공하길
당시 정부는 노동자들의 요구를 반영해서 헌법 초안에 ‘노동의 권리’를 명시했다. 그러자 부르주아들이 들고 일어났다. 이들에게 노동이란 기본적으로 자본가가 주는 일감이었다. 노동자가 행사하는 권리가 아니라, 기업이 그 기회를 제공하고 허락했기 때문에 노동자가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자본가의 계획 속에서, 자본가의 호의를 통해, 자본가의 권리로서 이루어져야 한다. 만약 국가가 나서 일자리를 만들어야 한다면 노동자가 무슨 권리를 가져서가 아니라 불쌍한 처지에 있기 때문이다.
결국 부르주아들이 승리했고 초안에 들어 있던 ‘노동의 권리’라는 문구는 삭제되었다. 부르주아들은 당시 한 비평가의 표현을 빌리면 ‘노동의 권리’라는 “어이없고 가련하며 순진한 염원”을 ‘원조의 권리’라는 말로 대체했다. 노동자는 국가에 도움을 청할 권리가 있다고 했다. 그렇게 해서 ‘구빈원’ 형태의 국민작업장이 만들어졌다. 정부는 빈민들을 모아놓고는 해도 좋고 안 해도 그만인 일들을 시키고는 푼돈을 쥐여주었다. 그곳에서 노동자들은 권리의 행사라고는 도저히 볼 수 없는 일들, 빌어먹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일들을 해야 했다. 시간이 지나자 이런 쓸데없는 일에 세금을 낭비해야 하느냐는 납세자들의 비난이 쏟아졌고, 정부는 이를 핑계 삼아 작업장을 폐쇄해버렸다.
지금은 얼마나 다를까. 헌법 조항에 들어 있기는 하지만 한국 사회에서 노동의 권리는 여전히 권리라기보다는 원조의 요청이 아닐까. 그런데 올해 서울시가 ‘노동의 권리’에 대한 내 불신을 흔드는 중대한 실험을 시작했다. 다음달부터 시행되는 ‘권리중심 중증장애인 맞춤형 공공일자리’ 사업이 그것이다. 정말로 눈을 비비고 다시 들여다보게 되는 사업이다. 어색해 보일 정도로 강력하게 사업 이름에 ‘권리’라는 말을 써놓았다. 게다가 노동의 주체를 최중증장애인들로 설정하고 이들 노동에 최저임금 기준을 적용하겠다고 했다. 노동의 내용도 그렇다. 중증장애인들의 권리 옹호 활동, 인식 개선 활동, 문화예술 활동 등을 노동으로 인정했다. 뿐만 아니라 탈시설한 최중증장애인들에게 우선권을 줌으로써 이들이 임금을 지역사회에서 살 수 있는 자원으로 삼도록 했다. 이는 노동의 이름으로 최중증장애인에게 지역사회에서 함께 살 권리가 있음을 인정한 것이고, 이들의 활동이 기업의 이윤보다 값진 사회적 가치 생산활동임을 인정한 것이다. 부디 성공하기를 바란다. 정말로 노동의 권리가 이런 거라면 나는 헌법 32조의 열렬한 옹호자가 될 준비가 되어 있다.